매일신문

[김순재의 힐링 토크] 프랑스에서 와인과 사랑에 빠진 소믈리에 최낙현 씨

"와인은 알수록 황홀, 50세에 유학와 5년째 공부…한국 최고 돼야죠"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불어를 택하면서 그와 프랑스의 인연은 시작됐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 근처 공단에 기계류를 수입하러 온 프랑스 사람의 통역을 맡으면서 그에게 프랑스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프랑스 사업가와의 인연으로 1989년 샴페인의 본고장인 랭스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파리8대학 불문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10여 년, 유럽어문학과가 통폐합되면서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소믈리에가 되겠다며 나이 50에 또 프랑스를 찾은 것이다.

마산이 고향인 최낙현(55) 씨. 그는 1년 만에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으나 와인을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5년째 포도주 공부를 하고 있다. 와인과 사랑에 빠져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고 있는 최 씨를 재스민꽃이 한창인 프랑스 남부 지중해 도시 니스에서 만났다.

-벌써 50대 중반이다. 와인 공부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

▶와인 공부는 단순히 자격증만 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와 토양도 공부해야 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봐야 소믈리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일주일 이상 와이너리에서 포도를 직접 따보지 않은 사람은 와인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2년 정도면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어학을 배우고 와인 공부를 하는데 2년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와인 공부를 하면 할수록 관련된 공부가 뿌리처럼 엮어져 있다. 토양 공부, 기후 공부 등등…. 주변에서는 끝도 없는 공부를 왜 그렇게 오래하느냐며 성화다.

-지금까지 해온 와인 공부를 간단히 소개하면.

▶프랑스에 온 지 1년 만에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으나 공부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보르도 2대학 양조학 관련 테이스팅 과정에 입학했고, 보르도를 마치자 보르도와 양대 산맥인 부르고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부르고뉴 대학에서 토양에 관련한 테이스팅 과정을 졸업했다. 다음해에 론 지방 와인대학에서 식음료 분석 과정을 마쳤다. 올해는 포도재배 즉 포도 농사법을 배우고 있다.

-가장으로서 공부만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지 않나.

▶아내가 한국에서 고생이 많다. 일을 해야 하는데 와인공부를 그만둘 수 없다. 아마도 와인의 매력 때문인 것 같다.

-와인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와인이 주는 즐거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괜찮은 와인을 만나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하다. 와인 맛은 오로지 마셔본 사람만이 알고 그 황홀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와인 공부를 하다 보면 '나는 맛을 보며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이 강렬하다. 와인 맛을 모르고 죽는다면 얼마나 원통할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다.(웃음)

-술도 못 마신다고 했다. 술 못하는 소믈리에, 재미있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보다는 못 마시는 사람이 와인 공부하기가 더 좋다. 와인을 마셔버리면 혀의 감각이 마비된다. 프랑스 와인학교는 테이스팅할 때 옆에 항상 와인을 뱉는 통이 따로 있다. 맛만 보고 다 뱉는다.

-와인을 인생에 비유했는데.

▶와인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나서 자라고 늙어서 죽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그래서 더욱 가치 있다. 특히 와인의 맛은 농장주인의 인품과 정성에서 나온다. 그만큼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술이다. 성실과 사랑으로 보살피면 멋진 와인이 나오게 돼 있다. 아무리 좋은 토양과 기후라 해도 농장주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없다. 이보다 더 인생을 닮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 삶도 와인처럼 멋지게 숙성되면서 짙은 향기를 풍겼으면 좋겠다.

-마셔본 와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와인은.

▶1988년 빈티지 보르도 뽀므롤 와인이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향과 맛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다. 프랑스에 처음 와서 어머니처럼 잘해주시던 분이 우리가 만난 해를 기념하기 위해 고른 것이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역시 최고의 와인은 사랑이 함께하는 와인이다.

-좋은 와인을 마셔보려면 부담이 많이 될 듯하다.

▶와인은 많이 마셔본 사람이 최고다. 그리고 비싼 와인을 많이 마셔 봐야 한다. 싼 와인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 가끔 같이 와인 공부하는 후배들이랑 돈을 모아 좋은 와인 한 병을 사서 시음하기도 한다. 정말 좋은 와인은 손님들이 소믈리에를 위해서 조금 남겨둔다. 그것을 맛보며 공부하라는 배려다.

-한국에도 소믈리에가 많다. 소믈리에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곳의 문화와 언어를 알아야 진정한 소믈리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도를 직접 따봐야 비로소 소믈리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도를 수확해보면 땅과 태양과 농장주의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와인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고급 와이너리에서 일주일 동안 포도를 딴 적이 있었다. 며칠을 앓아누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어떤 포도주라도 가볍게 여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프랑스에는 언제 오게 됐나.

▶1989년 2월이었다. 유학시험에 통과해서 프랑스에 첫발을 디뎠다. 프랑스 사람들은 키가 작아 키에는 주눅 들지 않았고, 이곳에 오기 전에 태권도를 배워두었던 것이 프랑스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에서 석사'박사 준비과정,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귀국해 모교에서 13년간 교편을 잡았다. 5년 전 와인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왔다. 프랑스에서 공부만 하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셈이다.

-유학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프랑스에서 정명훈 씨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그의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10일 정도 정명훈 씨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의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농구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클래식 음악을 접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한국인과의 인연도 많았겠다.

▶3년 전이다. 보르도 2대학에서 양조학 관련 공부가 끝날 무렵 대사관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한국인이 사고가 났다며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성지순례를 오셨던 분이었는데 약속 장소로 가는 기차에서 너무 긴장을 했는지 심장마비가 왔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주일 이상 현지 병원에 있었으나 가족들이 한국으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어렵게 귀국 수속을 밟아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의식이 돌아왔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직도 그분 가족과 연락하고 지낸다.

-프랑스의 매력이라면.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92년쯤, 스탕탈 사후 150주년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발표 시작 전에 눈에 익은 사람이 옆을 지나갔다. 바로 미테랑 대통령이었다. 바쁜 대통령이 작가 세미나에 참석해 1시간 동안 말없이 경청하다가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가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그들의 문화가 인상 깊었다.

-이곳 문화 중 가장 멋진 것이 있다면.

▶친구관이다. 그들은 또래끼리만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사람과도 서로 친구처럼 지낸다. 나 역시 나이 70이 넘은 사람을 친구라 부르고 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친구를 만나 의논하고 그 역시 젊은 나를 친구처럼 대한다. 나는 그의 경험을 배우고 그는 나의 새로운 생각과 트렌드를 배우게 된다. 세대 간의 단절이나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사실 우정에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프랑스라면 음식문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보통 3시간 정도 식사시간을 갖는다. 오랜 시간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여유를 즐기는 느긋함과 술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식전 와인과 식사를 하면서 먹는 와인이 있고 여기에 식사를 끝내고 먹는 와인이 또 있다. 그다음에 소화를 돕기 위해 코냑을 먹기 때문에 식사 중에 3, 4가지의 술을 마시게 된다. 그래서 3시간 이상 식사를 해도 식당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현실적으로 느긋하게 식사하는 습관도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식사하면 식대만으로 식당을 꾸려나갈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알려주고 싶은 식탁예절 팁이 있다면.

▶반드시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야 하고 탁자나 의자를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면 빵으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셰프에 대한 예의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프랑스에 와보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즐길 줄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즐기며 자신의 인생에 역사성을 부여한다. 개인과 가문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전통을 존중하고 함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도 개인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 또 프랑스인들은 자녀교육에 아주 엄격하다. 다른 사람에 피해를 주는 경우 체벌을 할 정도다. 우리처럼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는 행동을 해도 지켜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는 언제쯤 갈 것 같은가.

▶대책 없이 와인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자 아내가 극약 처방을 내렸다. 3년 전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을 프랑스로 보낸 것이다. 아들은 지금 프로골퍼를 목표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가끔 아들 골프백을 매고 캐디로 대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꿈이 있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소믈리에가 되는 것이다. 아들의 공부가 남아 있어 몇 년간 프랑스에 더 있어야 할 듯하다. 그동안 프랑스 전국을 다니며 곳곳의 좋은 와인을 모두 맛보고 싶다. 욕심이 너무 많은가?

글 사진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