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전문, 『이슬의 눈』, 문학과 지성사, 1997)
희망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가 말하듯이 "희망은 언제나 환멸을 동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환멸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희망의 가장 친숙한 형태가 백일몽이다. 그러나 이 백일몽은 그저 백일몽일 뿐이다. 백일몽을 꾸는 자가 일어서서 그 꿈의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창조해 낼 때 그 행위 속에서 희망은 존재한다."
내 속에 들어 있는 것,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희망은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이리가레(1932~)의 말을 인용하자면 희망이란, 사랑이란 "친밀한 빛의 거주 안에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도록 허락하는 어루만짐, 그러면서도 또한 환히 비추고 비추어지며 타자를 만나러 나가고 또 다른 밝음을 맛보기 위해 자신의 세계로부터 흘러넘치는 어루만짐"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 희망을 믿지 않는다. 눈앞의 보이는 것만 좇는 우리의 세속성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은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지만 그것이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영원히 연기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먼 길 떠나는 작은 성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 눈물겨움이 아프고 아득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인 것을.
시인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