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행원 시절 "그만둬야 하나"
생각 들 때쯤 회사서 단체 산행
손 내밀고 등 밀어준 동료에 감사
은행장 된 후 '등산 경영' 몸소 실천
지난 주말,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찾지 못했던 북한산을 오랜만에 올랐다. 날씨도 덥고 꽤 오랜만에 산을 타서 그런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등산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백운대 정상에서 맞이한 시원한 바람과 눈 아래 펼쳐지는 광활한 풍경은 모든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상쾌했다.
누구나 산을 좋아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환경적인 이유가 컸다. 내 고향 경주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주변이 모두 산이었다. 눈만 뜨면 산이 보이는 곳에서 자랐고, 방과 후에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이나 머루를 따 먹는 게 일상이었다. '산이 거기 있으므로 산에 오른다'는 영국의 유명한 등산가 조지 맬러리의 말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산을 좋아했다기보다는 그냥 산에 자주 가다 보니 산을 사랑하게 된 셈이다.
그러던 내가 등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갓 은행에 들어간 신입행원 때였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고시원에서 늘 혼자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던 나는 온종일 지점 안에서 수십 명의 직원과 함께 부대끼는 공동체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덤벙대는 성격 탓에 간단한 서류 정리조차 실수해서 선배들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자신감도 점점 없어졌다. '그냥 그만둬야 하나'라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 무렵, 지점에서 단체로 산행을 가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의 등산이었다. 그동안 공부한다며, 직장생활한다며 운동을 게을리해서인지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서인지, 그토록 무섭던 선배들이 내가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대신 메주기도 하고, 등을 밀어주며 조금만 힘내라고 끊임없이 격려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정상에 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내게 무뚝뚝했던 사수가 막걸리 한 잔을 건네며 해준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니 뒤에 이렇게 많은 선배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냐?"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내 짐을 나눠 메어주고, 손을 내밀어 주고, 등을 밀어준 사람 모두가 내 동료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졌고, 후배들이 들어오면 한 번쯤은 같이 등산을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등산은 누군가를 이겨야 살아남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없이 훌륭한 스포츠다. 출발지에서 함께 시작한 이들과 함께 정상에 오르고, 함께 내려와야 한다. 동행한 동료들과 페이스를 맞추고, 뒤처지는 동료를 격려할수록 상하 및 경쟁 관계는 없어지고 동료 의식은 더욱 다져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조직의 많은 리더들이 개인적인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등산을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소통의 장'을 만들고, 산을 오르고 내리며 다양한 경영의 지혜를 배운다고 한다. 이른바 '등산 경영'이라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은행장이 되었을 때, 직원들과 자주 등산을 했다. 특히 매년 1월이면 시산제를 올리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태백산을 올랐다. 살얼음 덮인 산길을 오르는 것은 꽤 힘들었지만, 서로에게 손을 건네고 등을 밀어주며 하나가 됨을 몸으로 느꼈다. 영하 20℃가 넘는 추위 속에 태백산 정상의 바람은 칼같이 매섭고 차가웠지만, 모두가 정상에 오르고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 순간 직원들과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환호하던 때가 생각난다. 물론 정상에 오른 성취의 기쁨이라는 것은 개인 나름일 것이다. 체력과 인내심, 마음가짐의 세 가지 요소가 얼마나 조화롭게 갖춰졌는지, 함께 산을 오르는 이들의 단결이 얼마나 있었는지에 따라 정상에서 느끼는 만족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또 오르고 내리며 수많은 굴곡이 숨어 있는 등산의 어려운 순간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하나하나의 과정도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등산처럼, 구성원들이 목표를 향해 한마음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순우/전 우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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