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자연재해와 패전을 겪은 일본은 일찍부터 자원봉사 개념이 생겨났다. 재해, 사고 후 어수선한 사회를 수습하고자 주민들이 스스로 단체를 만들고 운영한 것이 자원봉사의 초기 모습이었다. 1995년 일어난 고베대지진 후 무너진 사회 기반시설을 다시 세웠던 것도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들의 힘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고 국가가 직접 나서 자원봉사를 활성화하고 지원하는 방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패전 수습으로 시작된 자원봉사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 전역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당시 두 곳을 합해 인구 60만 명이었던 도시에서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2만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유례없는 피해 규모에 일본 정부는 넋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역사상 외세의 침략을 당한 경험도 거의 없었고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도시 건물 전체가 무너지고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펼친 복구 정책이나 지원책도 미비했다.
오사카자원봉사센터 관계자는 "폐허가 된 곳에서 한낮에 발생하는 폭력, 절도 등의 범죄와 원자폭탄에 피폭된 피해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당시 상황은 끔찍했다"며 "국가가 홀로 수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이에 지역 독지가,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단체들이 피해지역에 생필품, 금품 등을 전달하는 자선 사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가가 아닌 주민들에 의한 자생적이고 비조직적인 봉사활동이었다.
마을마다 '노인클럽' '사회청년부' 등의 봉사 단체도 생겨나 노인이 나서 몸져누운 이웃 노인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청년들이 동네의 궂은 일을 했다.
민간에서 시작된 자원봉사 체계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점차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자원봉사' 의미를 만들어갔다. 1962년 정부가 지역마다 선의(善意) 은행을 설치하면서 행정기관과 봉사가 필요한 주민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모금활동이나 봉사활동이 필요한 곳을 발굴하거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일 등을 정부에서 관할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주요 도시마다 세워진 자원봉사센터의 시초였다.
1970년대 들어 석유파동, 고속 성장의 부작용 등으로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됐다.
가게우라 오사카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봉사활동을 하다가 정부가 개입해 체계화한 것이 일본 자원봉사활동의 특징이다"고 했다.
◆자원봉사의 성지 오사카
지난달 11일 오후 3시 오사카역. 적십자 버스에 탄 10여 명의 노인들이 헌혈을 돕고 헌혈을 독려하는 문구가 담긴 휴지, 등을 나누어줬다. 또 버스 앞 혈압을 재거나 헌혈 절차를 안내하는 곳에서 노인들이 서서 부스를 찾는 시민들을 안내했다.
이날 자원봉사를 하러 온 니에(60) 씨는 "오사카에서는 공공장소, 사회복지시설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다"며 "주부로만 살다가 지난 1년간 적십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나이가 든 뒤에도 활동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자원봉사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1995년 1월 고베대지진 당시 자원봉사에 참여한 사람은 100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대도시인 오사카 시민이 주축이 됐다.
방범봉사대가 구축돼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도 했고,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은 사고 현장 수습, 대피소에서의 이재민들의 생활 지원, 가설주택 공사 등에 투입됐다. 학생에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에서 나섰다.
지진 후 2년 만에 무너졌던 도로, 철도 등 기반 시설을 모두 복구하고 주택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를 토대로 일본에서 자원봉사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됐다. 지진 수습 후 '비영리활동촉진법'이 제정돼 일본 곳곳에 자원봉사센터가 생겨 지역의 대기업, 공무원에게 자원봉사 참여를 제도적으로 권장하게 됐다.
이 때문에 고베대지진이 일어난 1995년은 일본에서 '자원봉사 원년의 해'로 제정됐다.
가게우라 사무국장은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지진을 이겨낸 뒤 일반 시민들도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며 "지진 후 생겨난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 안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사회 공익을 위한 시민단체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글 사진 허현정 기자 hhj224@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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