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중순부터 농사일이 시작되었다.
천 평이라던 논은 다닥다닥 계단식 논이라 농사를 짓기는 힘든 곳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농사를 지으려면 꼭 있어야 하는 소도 없어 내가 소가 되어 쟁기를 끌고 남편은 소몰이가 되어 쟁기를 뒤에서 밀어야 했다.
아이는 논두렁에 가마니를 깔아 뉘어 놓고 일을 했는데, 젖 줄 시간이 되어 쫓아가보면 개미가 아이의 온몸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따갑거나 근지러울 만도 한데 순한 딸은 울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개미떼의 극성스러움에 단련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논농사를 짓는 틈틈이 제공집에 딸린 산에 가서 밭 개간을 서둘렀다.
원래 개간해놓은 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 합치면 5천 평이 넘었다.
우리는 거기에 고추를 잔뜩 심었다.
고추밭 고랑의 잡초를 매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남편은 남의 품일을 가기도 하고 화전을 더 넓히는 일을 하고 고추와 콩 고구마 등 밭을 매는 일은 완전히 내 일이었다.
아침 해가 뜨기만 하면 주먹밥을 두 개 말아 주전자에 물을 담고 딸을 들쳐 업고 밭으로 갔다.
밭 가장자리의 그늘진 곳에 딸을 두고 밭을 매다보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딸이 자지러지게 울어 가보니 뱀이 딸 앞에서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호미로 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는데,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사흘 동안 그 밭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뱀 한 마리를 죽이면 가족 뱀이 나타나 복수를 한다더라는 말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저녁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각자의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500년이 된 고옥인 제공집은 쓸데없이 커서 집을 돌보는 일도 꽤나 힘들었다.
마당에는 잠시만 방심하면 잡초가 올라왔고, 부엌은 조금만 소홀해도 노린재와 돈벌레가 끓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부엌을 깨끗하게 유지하게 위해 노력했지만, 황토로 만든 부뚜막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요즘의 주방처럼 반지르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마을 우물에 가서 다섯 동이의 물을 이고 와 부엌 물동이 항아리에 부어놓고 아침을 해 먹고 밭으로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얼렁뚱땅 저녁밥을 해서 먹는 부실한 일상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조금씩 머리가 어지러워져 갔다.
극심한 빈혈이었지만 그것도 모른 채 일이 고돼서 그렇거니 하면서 지나쳤다.
하지만 오래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루는 밭에서 쓰러져 해가 저문 후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두워진 전경에 두려움이 생긴 딸은 밭둑에서 울어대는데,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 하는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어둠이 깔려도 집에 오지 않는 것을 걱정한 남편이 밭으로 왔고, 우리 모녀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같이 일을 하러 가자고 했다.
화전을 개간하는 일도, 밭일도 논일도 같이 하자는 거였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며 자란 남편의 처신으로는 획기적인 제의였다.
나는 남편과 함께 화전을 늘리는 일도 하게 되었다.
톱에 괭이와 낫, 삽만으로 이루어지는 화전 늘리는 일은 말로는 설명이 쉬운 일인데, 막상 해보면 온몸을 써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밭 옆의 산에 있는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내 면적을 넓히는 일이었기에 종일 일을 해도 그리 넓어지지는 않아 사람을 기운 빠지게도 하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볼 때는 억척부부로 보일 만큼 우리는 농사를 짓는 일에만 매진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해의 고추는 작황이 좋았다.
1,000평의 논에서 수확한 나락도 소출이 좋아 절반은 시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집으로 가져다 드렸다.
고추 판돈의 일부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시동생의 학비로 사용하도록 드렸다.
시아버님은 고맙다고 하셨지만, 시어머님은 더 냉랭하게 그 돈을 받으셨다.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이깟 돈 준다고"
맏이가 돼서 분가를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데, 첫 딸을 낳고 더 이상 아이 소식이 없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셨다.
'아들을 낳는 일'로 일이 있거나 제사 또는 명절이 되어 시어머님을 뵙고 오면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긴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줄줄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어느 정도는 정착을 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라, 남은 돈으로 농사에 가장 필요한 송아지 한 마리를 샀다.
가을걷이 후에 치러진 제공집의 제사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祭群이 100명이 넘으니 그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후에 먹을 음복을 장만하는 일은 참 힘들었다.
다행히 마을에는 같은 성씨의 집안사람들이 몇 가구 있어서 도와주었으니 망정이지, 나 혼자서 그 많은 사람을 아이를 데리고 하라면 정말 못했을 것이다.
이듬해에는 화전을 더 많이 개간하기로 하고 사람을 쓰기로 했다.
남편은 그 사람들과 함께 화전도 개간하고 밭일도 돌보고, 나는 밥을 하고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주막까지 가는 거리도 좀 멀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막걸리 값이 비싸니 집에서 누룩을 만들어 막걸리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밀로 누룩을 만드는 일도 마을의 할머니께 물어 물어가며 겨우 배워 첫 번째는 실패를 하기도 했다.
하루에 다섯 명의 장정들 밥에다 새참까지 해 나르면서 집에서 가까운 밭을 가꾸려니 아침부터 밤까지 바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고 몇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라 냉장고 같은 것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석유곤로 같은 것도 없을 때였다.
항상 가마솥에 불을 지피거나 숯불 풍로에 밥을 하고 국을 끓여야 했는데, 더운 여름이면 그런 고역이 없었다.
요즘 텔레비전에 보면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항상 불을 지펴서 밥도 하고 국도 끓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걸 보고 젊은 사람들은 '낭만적이다. 슬로푸드다'하면서 탄성을 지르는데, 직접 그렇게 살아 본 늙은이가 볼 때는 지옥 같은 밥짓기로 보인다.
하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돈 걱정도 필요 없이 밭일 조금 하고 삼시세끼만 걱정하면 되니까 낭만으로 보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처럼 아이를 들쳐 업고 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물동에 들여 부어놓고 바가지로 아껴 쓰면서 밥을 해먹어야 한다면 그건 낭만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거기에다가 돈 걱정도 해야 하고, 반찬거리가 충분하지도 않으며 쌀이 부족해서 잡곡을 얼마나 섞어야 하나 고민도 해야 하니 말이다.
특히나 생선이나 고기를 구하기 힘들어 그때 가장 많이 해 먹었던 것이 냇가에서 잡을 수 있었던 다슬기국과 밀가루로 만들었던 장떡이었다.
장떡은 밀가루에 부추와 풋고추를 송송 썬 다음에 반죽을 하여, 무쇠솥에 밥을 할 때 같이 얹어 두툼하게 찐 다음 고추장으로 버무려 먹는 것인데, 너무 질리도록 해 먹어 지금은 돌아보기도 싫은 반찬이다.
그런데 우리집 아이들은 가끔 '엄마! 우리 장떡 해먹어요'하는데도 해주기 싫을 때가 있을 정도이니 장떡을 얼마나 해 먹었는지는 알만한 일이지 않은가.
반면에 아이들은 '일하는 사람의 밥상에 올라가고 남은 것'을 준 탓인지, 장떡에 대해 갈증을 가지게 되어,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 느껴지는 반찬이기도 하다.
하여튼 두 번째 해에는 품일 하는 사람들의 밥과 새참을 줄기차게 해 날랐다.
막걸리도 떨어지게 하면 안 되니까 주기적으로 누룩을 만들고 막걸리를 걸러야 해서 부엌에는 항상 막걸리가 발효되는 냄새가 나곤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집이 술도가 같다고 했다.
하긴 술지게미를 배고픈 딸이 먹고 홍알홍알 취해서 밭에서 일하다 들어와서 식겁한 적도 있으니 술도가에 버금가는 술 만드는 집인 것은 맞는 얘기였다.
점심과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밭으로 다니느라 내 머리는 마흔이 되자마자 가마 부분부터 탈모가 진행될 정도였다.
남편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도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탓인지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생활은 신문물과는 관련이 거의 없었다.
나는 농한기인 겨우 내내 싱거 미싱으로 옷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맡긴 옷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삯바느질을 한 셈이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재봉틀을 주실 때는 "옷을 사 입으면 비싸니까 만들어 입어"라고 하신 거였는데, 실상 재봉틀은 겨울 한 철 우리 집의 돈줄이 되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 재봉틀은 우리 아이들의 옷을 만드는 용도로 잘 쓰였다.
그리고 겨울철마다 삯바느질을 하도록 해 준 덕분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으니, 따지고 보면 효자 미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낯선 농사를 시작하다
개간한 화전과 원래 있던 화전을 합하여 총 2만평의 밭이 완공된 그 다음해에 남편은 획기적인 농사법을 배워왔다.
바로 비닐을 덮는 거였다.
이랑을 만들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씌우면 가뭄도 덜 탄다며 내게 설명을 했는데, 문제는 비싼 비닐 값이었다.
비닐 값이 너무 비싸다는 내게 남편은 "비닐을 덮지 않으면 밭고랑의 잡초를 누가 매야 되는데? 이제는 밭이 넓어 임자하고 나하고만 하는 것은 말도 안 돼. 사람을 써야 되는데 그 품값대신 비닐을 사면 돼"라며 설득을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우리는 2만평의 밭이랑에 비닐을 깔았다.
비닐을 깔 때는 흙이 물기를 머금고 있을 때 덮어야 하므로 한 번에 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했다.
하루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매달려 일주일 정도 일을 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농사짓는 방법도 특이하네'하면서도 '벌 짓을 하네'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도 비닐을 덮는 것을 보고 '헛짓하면서 돈만 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2만 평의 화전에 비닐을 덮으면서 남편은 집 앞의 밭에는 비닐하우스라는 것을 지었다.
발전한 농촌에서는 모두들 비닐하우스에서 농사 모종을 키운다는 거였다.
비닐하우스용 철제가 보급되던 때가 아니어서였는 지, 철제가격이 비싸서 그랬는지 남편은 산에서 나무를 잘라와 비닐하우스의 기초 골조로 사용했다.
휘어지는 나무를 불로 지지면 더 잘 휘어지는데 소의 코뚜레로 사용하는 노간주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일전에 누가 소 코뚜레를 만들었던 노간주나무를 좀 구해달라고 해서 집 뒷산에 올라갔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정말 많았는데, 산의 나무도 사람들이 쓰는 쓰임새에 따라 숫자를 조절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함께 노간주나무를 산에서 구해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천장이 높지 않아 하우스에만 들어가면 키를 절반 구부려 걸어야 하는 엉성한 하우스였지만, 농사용 모종은 그곳에서 잘 자랐다.
고추 모종을 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남편이 가져온 것은 전혀 다른, 처음 보는 씨였다.
담배씨라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살던 지역에서는 담배 농사를 거의 짓지 않아 나는 담배씨를 처음 구경했다.
"이걸로 뭘 하자고요?"
"올해는 담배농사만 지을 거야. 임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담뱃잎이 미국에서 인기가 좋아 나라에서 전부 수매를 해서 수출을 하지. 고추는 우리가 직접 팔아야 되지만, 이건 농사를 지어놓기만 하면 다 수매해가니까 팔 걱정은 안 해도 돼."
"농사만 지어놓으면 사 간다고요? 정말 우리가 팔려고 고생 안 해도 되요?"
"당연하지. 담배는 정부 사업이야. 전매청에서 하는 것이거든"
남편의 말을 믿고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평지밭에는 우리가 먹을 고추, 감자, 고구마, 콩과 각종 채소를 심고 화전에는 모조리 담배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동안 풍년초를 구경만 했지 담뱃잎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담뱃잎이라는 것이 찐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씨는 앙증맞게 귀여웠는데, 다 자란 담뱃잎은 더운 여름을 더 덥게 하는 이상한 작물이었던 것이다.
담배를 심을 때도 사람을 사야 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많아져 머리에 이고 다니는 걸로는 점심과 새참이 감당이 안 되었다.
결국 '여자라서'하며 하지 않았던 지게 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이는 옆집 아이한테 봐달라고 부탁해놓고 밥을 해서 지게에 얹어 산길을 2km씩 가야 하는 밥 배달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밭에서 일하다가 식당에 전화하면 배달해주는 점심밥을 먹는 요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정말 편한 셈인데, 그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여자가 해야 했다.
오전에 새참을 해서 가져다주고 오면 점심준비를 하고, 점심을 가져다주고 오면 오후 새참을 해서 가져다주어야 했다.
만약 만보기라는 것이 있다면 운동량이 정말 많게 측정되는 중노동의 일상이었다.
한번은 점심을 지게에 지고 가다가 산길에서 뱀을 만나 놀라는 통에 바구니에 담겼던 점심밥을 통째로 엎은 적도 있었다.
그 날 남편은 지게 작대기의 머리 부분으로 뱀 머리를 눌러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뱀은 여전히 징그럽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나마 그때 이후로는 뱀을 만나도 밥 바구니가 떨어질 정도로 놀라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담배 밭에는 왜 그리 뱀이 많았는지는 지금도 참 궁금하다.
아마도 담배 특유의 냄새와 찐득한 진기가 뱀을 불러들였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오후 새참을 가져다주고 오면 빨래도 해야 하고 물도 길어 와야 하고, 밭에 가서 잡초도 뽑고 비료도 줘야 했다.
감자를 캐는 일도 혼자의 몫이었다.
딸은 늘 옆집에 사는 아이에게 맡겨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밖에 안 된 아이인데, 그때는 그 정도면 집안일의 절반은 도울 나이였다.
아이를 보는 사례는 항상 건빵 한 봉지였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에서는 엉성한 건빵을 팔았는데,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골에서는 최고의 간식이었기 때문에 옆집 부모도 그 정도의 사례에 만족해했다.
아니, 모든 이들이 그 정도의 간식이면 옆집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할 때였다.
담뱃잎은 말릴 때 고추와 다른 점이 있었다.
고추는 그냥 햇볕에 널면 빨간 태양초가 되는데, 담뱃잎은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햇빛이 아닌 훈증으로 말려야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린다기보다는 훈증, 즉 쪄야만 되는 거라 담배 굴이 있어야 했다.
담배모종을 심어놓고 나서 남편은 담배 굴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나무로 담배 굴의 골조를 세워놓고 거기에 황토와 짚을 섞은 것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이 벽체를 만드는 거였고, 지붕은 당연히 짚으로 마무리되었다.
담배 굴은 담뱃잎을 매달아서 건조시키는 곳이라 천장이 아주 높아야 했다.
보통 집 천장의 세배 정도로 만들어야 했는데, 마을 장정 한 명과 나, 그리고 남편이 함께 만드니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큰돈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라곤 없는 사람 셋이서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담배 굴이 진척이 빠를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담배 굴을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하면서 훈수를 두니 일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 되는 우여곡절 끝에 담배 굴을 만들어졌다.
그렇게 힘들여 만든 담배 굴은 엉성하게 만든 덕분에 후일 사라호 태풍에 힘없이 무너져 버렸지만, 우리의 첫 담배 굴이라 애정을 갖고 만든 것은 확실하다.
담배를 찌는 일은 한 여름에 하는 일이었다.
담배 굴에 담배를 엮어 달아놓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건조하듯 쪄야 하는 건데, 화력이 항상 일정해야 했기 때문에 담배 굴에 담배를 넣고 나면 무조건 사흘은 누군가가 아궁이를 지키면서 적당량의 장작을 보충해주는 일을 해야만 했다.
우리집은 남편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으니, 밥도 담배 굴 아궁이 앞에서 먹어야 했다.
물론 잠도 담배 굴 아궁이가 있는 곳에서 자야 했다.
그러니 남편은 이틀 정도는 품일을 하는 사람들과 담뱃잎을 따서 엮어 다는 일을 하고 사흘은 담배 굴을 지키는 일을 하는 셈이라 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남편이 담뱃잎을 따는 일을 할 때는 일꾼들 밥에 새참을 해 나르고, 담배 굴을 지키고 있을 동안에는 남편의 삼시세끼를 해 날라야 했다.
갈아입을 옷도 계속 나르며 밭농사까지 하는 일은 더운 여름에 정말 힘들었다.
점심때면 냇가의 샘에서 길어오는 찬물이 유일하게 시원함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니 화기가 펄펄거리는 아궁이 앞에서 장작을 때야 하는 남편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주변에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물어가면서 하면 좋은데, 우리가 처음으로 짓는 농사이다 보니 무조건 혼자서 경험하고 개선하는 형태로 담배 농사를 지었다.
벼 수확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담배 굴에 찐 담배는 등급별로 분류를 해야 했다.
제공집은 본채는 두 개의 방과 부엌이 있었고, 뒤채는 커다란 방 2개에 대청마루가 있는 구조였다.
군불을 때는 아궁이는 바깥에 따로 있어, 군불을 가득 때고 커다란 방 2개에는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 예닐곱이 한 달간 먹고 자고를 하면서 담배 등급 포장(이걸 '담배조리'라고 부릅니다)을 했다.
가을에 따놓은 감홍시와 수확해 놓은 고구마를 찐 것이 간식이었고, 김장김치도 200포기를 해야 했던 첫 해를 보내면서 '겨울이 농한기'라는 말은 우리집에서만은 쏙 들어간 말이 되어버렸다.
담배를 등급별로 분류하느라 꽉 닫힌 방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면 담뱃잎 특유의 매캐함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추위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니 나는 그 일이 끝나는 1월만 되면 목이 쌔하게 막히는 증세를 그때부터 앓게 되었다.
담배는 노랗게 예쁜 색감이 나면 일등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란 색감이라도 군데군데 검은 점이 생겨버리면 등외가 되어 가격이 확 떨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담배 굴의 화력 조절에 좌우되는 것임을 등급 분류를 하면서야 알게 되어 남편의 노고를 새삼 알게 되었다.
남편이 담배 굴의 장작 개수에 왜 그리 연연해했는지도 그때야 알게 된 것이다.
다행히 첫 해의 우리 담배는 품질이 좋았다.
한 달간의 긴 담배조리가 끝나고 1월 초순에 화물차가 우리 집 앞으로 왔다.
제공집이다보니 우리 집은 마을의 중심에 있어 화물차가 겨우 들어올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자동차가 들어오는 일이 드문 산골짜기에서 담배를 수매하기 위해 화물차가 오는 것은 마을사람들에게는 아주 신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우리집의 담배밭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담배가 어느 정도의 수확을 가져다줄지가 아주 궁금한 듯했다.
남편은 담배를 실은 화물차를 타고 읍내 수매장으로 갔다.
수매를 하고 나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표를 주었는데 보름 뒤에 돈을 찾을 수 있는 표였기에 나는 그 전표를 '돈표'라고 불렀다.
2만 평의 첫 담배 농사는 상당한 수입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기억해보면 송아지 한 마리 값이 요즘 중형차 한 대 값에 육박하던 시절이었는데, 송아지 10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으니, 농사를 지어서 버는 돈으로는 정말 큰 금액이었다.
우리는 이 돈의 일부는 시댁으로 보냈 드렸고, 그해에 우리집 담배 농사일을 했던 사람들의 품삯을 치르고 이듬해 농사를 위해 돈을 남겨두었다.
막대한(?) 수익을 안겨다 준 우리의 담배농사는 마을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콩이나 고추 농사를 지어 현금화를 시켰을 뿐, 큰 벌이는 없는 빈약한 살림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 농사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다니까 몇몇 집에서 남편에게 담배농사를 지어보겠다는 청탁이 들어왔다.
이듬해에는 담배농사를 짓는 몇 집이 힘을 합쳐 함께 비닐하우스 3동을 지었다.
이웃 마을에서 볼 때는 완전히 선진 농사를 짓는 것으로 보여 구경을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해에는 농사철 내내 임신으로 인해 더 힘든 한해가 되었다.
남편은 원래 있던 담배 굴과 같은 부엌을 사용하는 구조로 또 하나의 담배 굴을 만들었다.
담배 굴도 하나 더 만들었고, 담배 농사의 노하우도 생겼으니 전해와 비슷하게 흘러간 한해였으면 좋았지만, 태풍 사라의 피해를 우리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피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일반적인 집보다 높이가 있었던, 그러면서도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던 담배 굴의 지붕과 벽체 윗부분이 모두 붕괴된 것과 추석임에도 시댁에 가지 못한 것이 우리가 입은 피해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면 다른 지역은 쓸어가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얼마나 다행이냐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편은 '내년에 튼튼하게 지어야지'하면서 발 빠른 포기를 했고, 나는 연말에 무사히 둘째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시누이편에 전해진 시어머님은 노기가 대단하셨다.
"쓸모없이 딸만 낳는다. 아들 많은 집에서 델꼬 왔더니 왜 딸만 낳는지."
담배 등급 작업을 하는 계절이라 산후조리를 한다고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방학을 맞은 바로 아래 시누이가 와서 어설프게나마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우리가 보내주는 돈으로 다니는 학교였기에 감사하다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해 주었다.
시누이는 "엄마는 원래 돈 많다고 떵떵거리던 사람이라 막말을 하니까 이해하라"며 위로해주어 둘째딸에 대한 서운함은 조금 덜했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딸은 아들처럼 키워졌다.
첫째와 달리 울음소리도 우렁찼고 골격도 튼튼했기 때문에, 큰 아들이 없던 우리집에서 둘째는 아들과 다름없이 소를 키우고 쟁기는 끄는 역할로 자연스럽게 키워져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시어머님의 노기는 오래 가지는 않았다.
1월에 담배 수매를 한 돈으로 시댁에 밭을 산 덕분이었다.
논은 비싸서 살 수 없어 일단 보리와 좁쌀 수수를 심으면 양식에 보탬이 될 밭을 샀다.
남편은 자신이 모두 팔아버린 논밭에 대한 죄송함으로 밭의 명의를 아버님으로 했다.
당시에 이 일로 '나도 열심히 일한 돈인데'하는 마음으로 서운함이 없지 않았는데, 남편이 아버님으로 명의를 한 덕분에 이 밭은 후일에 남아있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밭을 사 드린 덕분에 시어머님은 노기를 잠재우셨고, 아버님도 농사를 지을 농토가 생겨 조금은 가슴을 펴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시댁에 농토를 조금씩 구입했다.
"저축"이라는 것은 아예 몰랐고, 무조건 농토를 사는 것이 최고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농민에게는 농토가 최고의 재산임을 누구보다 실감했기에 그런 우리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젊은 사람들이 이런 우리를 보았다면 "참으로 미련스럽다"고 했을 수도 있는데, 이 일은 화폐개혁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1962년. 2월.
설날(당시에는 모두 구정)을 지내고 보름 후에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이번에도 시누이가 산후 구완을 해주었다.
보름의 산후 조리가 끝난 후에 시어머님께 아이를 보여주기 위해 시누이와 함께 시댁으로 갔다.
큰 아이는 걷게 하고 둘째 아이는 시누이가 손을 잡고, 나는 셋째를 업고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갔는데, 시어머님께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휙 돌아 앉아 버리셨다.
"어디서 가시나만 셋을 델꼬 간 크게 시집 문턱을 넘노? 니가 칠거지악으로 쫓겨나봐야 니 잘못을 알 기가?"
하긴 당시에는 '아들을 못 낳는 것'이 칠거지악으로, 아들을 낳기 위해 첩을 들이는 것이 당연하던 때라 시어머님의 노기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걸 시어머님은 '담배밭에 일해서 딸만 낳는다. 남자들이 피우는 담배인데 여자가 기 세게 담배밭에서 일을 하니 딸만 낳는 거지'하면서 억지를 쓰시기도 하셨다.
남편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담배 농사를 짓는 덕분에 우리가 밭도 사고 논도 사고 하는데. 그리고 누가 딸만 낳고 싶어서 그렇습니까? 다음에는 꼭 아들 낳을 겁니더. 점쟁이도 다음에는 분명히 아들이라고 했심더."라는 말로 시어머님을 달래보았지만, 화를 푸시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집을 짓겠다는 말을 하자 시어머님은 그때서야 화를 조금 푸셨다.
우리는 시댁 마을에 30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그해에 번 돈을 모두 집 짓는데 쓰기로 했던 것이다.
언제까지 시부모님과 시누이가 남의 행랑방살이를 할 수는 없으니, 집을 짓는 것이 급선무이기도 했다.
공사는 바로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귀하다는 회벽도 바르고 지붕은 기와로 했으며, 방의 크기도 다른 집 방보다는 크게 만들었다.
본채에 네 개의 방과 대청, 부엌이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셋째 아이와 나이가 같은 이 집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어 우리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게 하는 구심점이 될 정도로 단단하게 지어졌다.
집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화폐개혁이 있었다.
그동안 사용했던 "환"이라는 돈이 "원"으로 바뀐 일인데, 현금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득이 되는 개혁이었다.
그동안 돈을 모으지 않고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일에 썼던 우리에게는 이 화폐개혁이 별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저축만 했더라면 우리 돈은 10분의 1의 가치로 뚝 떨어져 우리의 회생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남편은 이후에도 '내가 선경지명이 있었지'하는 자화자찬의 소재로 썼다.
그리고 그해에 담배 굴을 튼튼하게 다시 지었다.
이번에는 좀 튼튼하도록 황토로 벽돌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황토 벽돌을 붙인 다음 황토로 다시 벽체를 마무리하는 식으로 튼튼한 답배 굴을 짓고 나니 부자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시댁에는 집도 지어드렸고, 담배 굴도 2동을 새로 지으니,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담배농사는 아주 잘 살게 되는 농사"로 인식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우리가 지은 담배 굴은 우리 마을을 '담배 마을'로 만들 중심이 되었다.
4. 세상으로 나가다
마을 사람들의 기대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담배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하면 안전한 농업이었다.
다른 작물처럼 시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조금씩 오르는 수매가격이 매력적인 농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났다.
그런 중에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우리는 학부모가 되었다.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경상도 남자였던 남편은 큰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자, 당연한 듯이 육성회장(현 학부모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긴 했는데, 이것이 남편이 대외적으로 쓰게 된 첫 감투였다.
이때부터 남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돈은 안 되면서 돈은 쓰게 되는 감투'를 많이 썼다.
우리 아이들이 후일에 '울 아버지는 감투병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육성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말에 시어머님께서는 "가시나한테 무신 투자를"하면서 혀를 차셨지만, 남편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막내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의 육성회장직을 20년 동안 한 해도 빼지 않고 맡았다.
시골에서는 드물게 보는 교육열을 갖고 있었던 셈이었다.
남편의 그런 교육열 덕분이었는지 아이들은 모두 반듯하게 자랐고 우등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그 감투는 우리 가족에게는 고마운 감투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나는 넷째를 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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