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유달리 허허로운 날이 있다. 속절없이 내리던 비가 뚝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채비를 하고 나섰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을 때가 있다. 텅 빈 듯한, 주변이 광활한 우주공간처럼 넓어 보일 때가 있다.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에 연락처를 들춰보면 모든 것 팽개치고 달려올 사람 하나 없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자기만의 취미생활과 생업을 위해 바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현듯 생각나는 몇몇이 있어 나를 반겨 주리라는 기대를 하며 수화기를 든다. 뚜렷한 직업 없이 평소 시간적 여유가 있을만한 친구에게 만나자고 해 보면 그날따라 벌써 선약이 있다. 다들 왜 이리 바쁘게 사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지 모른다. 정작 챙겨야 할 것은 그냥 두고 허황한 것으로 온종일 바쁘기만 한 날도 수없이 많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허탈한 하루이다.
그래서일까? 하루가 마감되는 저녁 시간을 나는 유달리 힘들어한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마치 풀밭에서 엄마를 찾는 어린양처럼 불안하고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기억이 있다.
긴 여름날 저녁, 해는 쉬 빠지지 않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며 저녁연기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골집에서 남새밭으로 가는 길은 쓸쓸했다. 밭둑에는 들깨순이 뽀송뽀송하게 올라와 있었고 손바닥만한 밭에는 상추, 쑥갓, 오이, 옥수숫대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함께 간 복실이가 이 고랑 저 고랑 뛰어다니며 흩트려 놓아도 언제나 싱싱하게 다시 일어나는 쑥갓과 야채들.
그 고즈넉한 시골 저녁풍경은 나를 외롭고 슬프게 했다. 이유가 없다. 그저 도랑가에서 어린 염소가 '음매' 하는 소리에 눈물이 맺혔고 꾸부정하게 지게를 지고 돌아가는 맹숙이네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도 까닭 없이 눈물이 났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은 이렇게 쓸쓸한 기억으로 점철돼 있다.
어느 시인은 사람이니까 외롭다고 했지만, 무릇 시인은 외로움을 즐겨야 한다지만 두서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요즘은 더 외롭다.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가장 외롭다.
이제는 익숙한 외로움에 길들여져 견딜 만도 할텐데 외로움은 무섭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느 코미디언이 "사람은 심심해서 죽는다"고 했고 K영화배우는 "외로워서 죽는다"고 했다. 결국 외로우면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 외롭지 않으려고 바쁘게 보내는 모양이다.
아무리 일이 많아 바쁘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뒤돌아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진정으로 가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다 허울이고 헛것이다.
이 세상 무엇으로도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절대적인 것이다.
문차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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