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나그네/복거일 지음/문학과 지성사 펴냄
소설가 복거일 씨가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를 출간했다. 1988년 8월 '중앙경제신문'에 연재를 시작해 1991년 3권의 책을 출간한 뒤 25년 만에 3권을 추가해 총 6권으로 펴낸 것이다. 1991년 3권을 출간한 뒤 다른 책 집필과 공부, 강연 등으로 세월을 쓰던 중 2012년 암 진단을 받고 '이 책의 마무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죽음과 경주한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암 진단을 받던 날 '그럼 역사 속의 나그네는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후속 편을 쓰지 못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독자들을 잃는 아픔이 내가 의식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찰실을 나오면서 스무 해 넘게 손을 대지 못한 작품을 끝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안식구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병원엔 안 가겠어. 역사 속의 나그네를 끝내고 죽어야지. 안식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의 나그네'는 2070년 인물 리언오가 일종의 타임머신인 '가마우지'를 타고 백악기 탐험을 떠났다가 1578년 조선 사회에 좌초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개항, 일제식민지, 6'25전쟁도 없었던 옛날이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사상,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미래 인류가 과거로 돌아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쓸 때 지은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조선의 노예제가 우리 전통사회에 미친 영향이었다.
지은이는 "나는 우리 사회의 노예제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혹독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그것이 우리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한 근본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노예제가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그것을 없애지 않고는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할 수 없다는 '개념적 돌파'를 이룬 지식인이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했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이 소설은 주인공 리언오가 조선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과 의학적, 기술적 지식으로 병들고 배고픈 사람을 살리는 일, 나아가 반상의 평등과 남녀의 평등을 기치로 반란군을 이끌고 관청을 공격하는 등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지식은, 새로운 사상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 복거일은 대부분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대기업 근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다. 경제학과 사회과학, 회계 등에도 상당히 밝아 여러 편의 사회평론서를 내기도 했다. 보수 경향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사회평론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 작품에는 대체로 넓고 깊은 지식이 배어 있다.
이 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역시 이른바 '지식 소설'이다. 주인공 리언오는 자신의 현대적 지식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저수지 사업을 펼쳐 농경을 이롭게 하며, 군사를 현대식으로 조직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지은이는 20여 년 전 이 소설을 쓰기에 앞서 자료 수집 차 충청도 서북부 일대를 오랜 시간 답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보통 사람들의 개인적 삶에 관한 기록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층민의 삶을 관료들이 기록으로 남겼을 리 없었고,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전국을 노략질한 탓에 그나마 남아 있던 기록도 사라졌다. 지은이는 현지를 둘러보며 지도와 읍지를 대조하며 옛 마을 모습을 상상했다. 물가나 물건값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는데 슬프게도 노비를 매매하면서 다른 물건과 어떻게 교환했다는 기록을 통해 물건값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체 6권인 이 소설은 첫 권의 중간쯤을 지날 때부터 등장인물들의 대화뿐만 아니라 소설 지문 중에도 일부는 중세 국어로 표기한다. '스승님, 이리올아오쇼서'(올라오십시오), '므슥으로 대졉한다?'(무엇으로 대접한다?), '더 드시고져 식브시면'(더 드시고 싶으시면)이란 대화가 그대로 등장한다.
지은이는 "중세 국어가 독자들에게 불편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긴 작품이라서, 읽다 보면 독자들도 중세 국어에 차츰 익숙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고, 또한 주인공 리언오가 중세 언어에 젖어드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 당시 낱말을 많이 썼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당시의 언어습관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매우 어려웠고,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 면도 있다고 회고한다.
이 소설은 시간여행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여행, 낯선 세계 보여주기가 이 소설의 목적은 아닌 듯하다. 소설 작품을 통해 지은이는 그의 평생 지론이기도 한 '지식이 참담한 시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우리 삶에 올바른 지식이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1권 386쪽, 2권 416쪽, 3권 364쪽, 4권 440쪽, 5권 382쪽, 6권 418쪽. 1'3'5권 1만3천원. 2'4'6권 1만4천원.
조두진 earful@msnet.co.kr
사진: 조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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