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종묘(宗廟)는 이른바 귀신을 모시는 곳이다. 바로 조선의 역대 임금과 왕비 등 왕족, 공을 세운 조선의 여러 신하 귀신을 기리는 곳이다. 종묘에 가면 '배신과 화해'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배신'과 연상되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고려 31대 공민왕,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이야기가 얽혀 있어서다.
태조는 1392년 7월 즉위했다. 그리고 고려 왕경에 새 종묘를 마련했다. 이씨의 4대 선조(先祖)를 모시기 위해서다. 또 고려 왕도를 떠나 새 도읍지 한양으로 천도했다. 1394년 10월, 한양 새 터전 이전과 함께 서둘러 종묘를 지었다. 1395년 9월 공사를 끝내고 선조를 새 사후 정원인 정전과 영령전에 모셨다.
태조는 이때 이씨 왕족 전용 종묘에 공민왕 부부 전용의 신당(神堂) 하나를 더 세웠다. 드넓은 종묘 입구의 깊숙한 한 귀퉁이다. 공민왕 신당과 관련해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종묘를 건축할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그치고 보니 공민왕의 영정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었다.' 조선조 때 공민왕 사당은 종묘 밖 마포지역에 하나 더 생겼다. 2개가 되는 셈이다.
기록은 없으나 두 임금의 인연을 살피면 그 배경을 추측할 수 있다. 원(元)나라 횡포에 시달린 공민왕은 고려를 다시 세우려 개혁에 나섰다. 물론 일제 친일파처럼 원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부원파(附元派)와 원이 저항했다. 왕은 이자춘, 이성계 부자(父子)를 발탁했고 뒷날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했다. 이는 고려로 보면 '배신'이었다. 태조는 자신을 발탁한 공민왕을 종묘에 모셔 '배신'을 '화해'로 화답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종묘에는 조선조 공을 세운 신하를 위한 공신당이 있다. 모두 83위(位)를 기리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여기에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은 없다. 그는 태조를 도와 조선의 밑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태조 아들 태종에 맞서는 바람에 역적이 됐다. 그 '배신'의 역적 딱지로 공신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화해는 460년이나 지나 이뤄졌다. 1398년 태종에 의해 죽음을 맞은 뒤 흥선대원군 시절인 1865년에야 복권 명령이 내려졌으니 말이다. 역사는 배신과 화해의 되풀이다. 지금 정치권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등을 지는 '배신'의 시간이다. 바야흐로 총선의 결투시간이 다가온 모양이다. 화해의 조용함이 드리울 때까지 당분간 시끄러울 정국에 종묘라도 한 번 돌아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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