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눈물샘 자극" 중압감 시달린 듯
#전투신 30분 위한 전반 90분 전개 지루
#80억원 제작비 쏟아부을 가치 있었을까
텍스트의 질적인 부분을 평가하는 데 있어 콘텍스트적 요소를 우선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영화나 드라마, 예능과 같은 콘텐츠에 대한 비평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콘텐츠의 만듦새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대중문화계 또는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순 없다. 단, 외적인 요소를 감안하되 콘텐츠 자체의 질적인 수준이 떨어진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도 '못 만든 작품'이란 말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정확한 비평을 하는데도 대중이 '이 작품을 그렇게 봐선 안 된다'라며 방어막을 친다. 영화 '연평해전'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케이스다.
◆애국심 마케팅, 관객 눈 가려
지난 6월 24일 개봉된 영화 '연평해전'은 7월 둘째 주까지 5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불러모으며 흥행작 반열에 올랐다. 손익분기점인 240만 명을 훌쩍 뛰어넘어 흥행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신작 개봉에도 여전히 가장 많은 스크린 수를 유지하며 극장가 흥행 순위 1, 2위를 다투고 있다. 군인을 포함한 공무원, 또 교육기관의 단체관람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누적 관객 수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일단, '연평해전'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를 정리하고 가야겠다. 이미 개봉 4주 차로 접어든 히트작을 굳이 깎아내리는 의도가 뭐냐는 일종의 의혹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노파심 때문에 '영화는 영화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내세우려 한다. '연평해전'을 관람하고, 내용에 감동받아 눈물짓는 관객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다. 관객의 개인적인 취향은 존중받아야만 하며 어떤 전문가도 이를 조롱해선 안 된다. 여전히 작품의 완성도보다 이슈에 휩쓸리는 국내 영화 관객들의 안타까운 치우침 현상을 한탄할 순 있겠지만, 작품을 보며 개인이 느낀 감정까지 컨트롤하려 드는 건 월권행위다.
바꿔 말하면, '연평해전'에 대한 평단의 비판에 '의미 있는 영화를 그런 식으로밖에 평가 못하냐'라는 논리로 맞서는 일각의 행동 역시 명백한 월권행위다. 외적인 요소와 영향력, 그리고 의미를 두고 다각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영화 자체의 만듦새에 대해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이쯤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챘을 것으로 생각된다. 맞다. 필자는 '연평해전'을 21세기 영화비평의 영역에서 굳이 평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진부한 작품이라 판단하고 있다. 내러티브를 풀어내는 방식은 진부하고, 캐릭터 역시 평면적이다. 그저 후반부 30여 분의 전투신을 보여주기 위해 힘겹게 전반 90여 분을 끌고 간다. 이 과정은 지극히 평이하고 무미건조해 지루함을 유발한다. 그리고는 주요 캐릭터들을 나열하고 가족주의를 촌티 나는 방식으로 부각시키며 '이렇게 건실한 청년들이 잠시 후 죽게 됩니다. 그러니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해 주시고, 언제까지나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주입시킨다. 주제 하나를 명확히 강조한 건 좋지만, 80억원 상당의 제작비를 쏟아부으며 만든 '대중영화'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연출은 섬세하지 못하고 '어서 전투신을 보여주고 눈물샘을 자극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듯하다.
연출자 김학순 감독은 "애국을 주제로 한 미국 영화들이 자국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만든다. 우리나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제작 동기를 밝혔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적 완성도다. 김 감독이 말한 소위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영화'를 나열해보자.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호크 다운' '진주만' '에어포스 원', 그리고 대놓고 '미국 만세'를 외쳤던 '인디펜던스 데이' 등이 있겠다. 관점에 따라서 논란의 소지가 있거나 실제로 개봉 당시 "미국인들의 오만과 자만심이 드러나 불편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완결성 있는 각본에 뛰어난 연출, 또는 영화계를 놀라게 할 만큼의 기술력이나 단순히 뛰어난 오락성만으로도 화제가 된 영화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1980년대 반공영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평해전'은 만듦새로 따졌을 때 미국 우월주의가 드러났던 히트작들과 동일 선상에서 평가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관객들은 정말로 '의무감'이나 '군중심리'가 아닌 영화적 가치에 대한 소신 때문에 '연평해전'을 옹호하고 있을까.
분명, '연평해전'은 국방부 홍보영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려 17년 전에 만들어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했을 때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접근법이 진부하다. 기술적으로도 떨어진다. 차라리 같은 기준에서 '연평해전'을 평가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처럼 기자나 평론가들이 낮은 점수를 줬다고 관객들로부터 욕먹을 일은 없을테니까.
◆애국심 마케팅, 촌티 나는 영화의 생존법인가
지금 '연평해전'을 일방적으로 감싸고 있는 일부 관객들을 보고 있노라면 2007년 '디워' 개봉 당시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당시 국내에서 840만 명의 관객을 모은 히트작이다. '순수 국내 기술로 할리우드까지 공략한 블록버스터'라는 사실과 함께 후반부에 '아리랑'까지 BGM으로 쓰며 '한국을 세계에 알린다'고 강조했던 영화다. 기본기가 부족한 영화였지만 전형적인 애국심 마케팅을 활용하며 국내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 막강한 팬덤을 구축했다. 형편없는 연출력에 허술한 내러티브로 언론과 평단의 집중적인 혹평을 받았지만 팬들은 이에 맞서 '디워'를 살려냈다. '디워'에 가혹한 비판을 가하는 글이 나오면 글쓴이의 '신상'까지 털어가며 공격했다. 기자와 평론가를 향해 "네가 뭔데 '디워'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하느냐"는 비난이 관련 게시판 등에 쏟아졌다. 작품 자체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막아서는 비이성적인 치우침 현상이었다.
지난해 1천760만 명이란 기록적인 수치로 한국영화 사상 최대 히트작이 된 '명량' 역시 애국심 마케팅의 수혜를 입었다. 물론,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연평해전'이나 '디워'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뜬금없이 사라져버리는 주요 캐릭터들,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 툭툭 끊어지는 전개 등 애초 기획과정에서의 계산과는 확연히 달라져 버린 듯한 실수들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러닝타임을 줄이고 그 안에서 넘치는 촬영 분량을 소화하려다 보니 캐릭터와 캐릭터 간에,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연결고리가 엉성해지고 이순신 캐릭터가 끌고 가는 감정선의 흐름도 약해졌다. 장시간의 대규모 해상 전투신에 이순신이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조명 등 의미 있는 시도가 있었지만 완성도에 대한 혹평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허술한 만듦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관객 수를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애국심 마케팅의 승리다. 조선 영웅 되돌아보기,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긍지와 애국심 고취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 '꼭 봐야 할 영화'로 지목되면서 사실 그렇게 완성도가 높지 않은 이 작품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만한 놀라운 기록의 소유자가 됐다.
여기서 의문 하나. 보수적 관점에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영화들은 왜 하나같이 촌스러울까. 소위 진보성향의 영화들이 가진 세련미와 완성도, 특유의 도발적인 매력은 보수성향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걸까. 왜 '연평해전'은 '변호인'이나 '소수의견'처럼 '잘 만들지' 못했을까. 애국심 마케팅은 '잘 못 만든' 영화가 내세울 최후의 보루인가.
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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