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꽃은 흔들리며 피나니

선진국'비(非)선진국을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얼마나 주느냐는 것이다. 미국 경우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할 기회를 한 번쯤은 다시 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실패한 사업가에게 재기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실패는 '영원한 낙오자'가 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주 대구경북연구원에서 열린 '대구시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출범 의의 및 정책 과제'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여하면서 우리 사회는 실패'부적응한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얼마나 주느냐는 문제를 곱씹어보게 됐다. 학교를 떠나 제도권 교육 밖으로 이탈하는 이른바 '학교 밖 청소년'이 지난해 전국적으로 6만 명, 대구에서 2천300여 명에 달했다. 전체 학생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학교를 떠난 청소년 중 41.5%는 검정고시 준비, 학원 수강, 기술 훈련, 대안교육시설 등 어떤 형태로든 공부를 이어간다. 하지만 46.9%는 학습이나 일도 하지 않고, 11.5%는 지속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미국(7.4%), 독일(6.5%)과 비교했을 때 우리 학업중단율 1%는 언뜻 매우 낮은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미국'독일은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을 위한 직업교육 등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그물망이 촘촘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학업 중단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교육 등 사회적 기반이 아직 열악하다. 대학 진학이 보편화한 우리나라에서 초'중'고교 단계에서의 학업 중단은 사회적 소수자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괄호를 쳐놓고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따지는 우리 사회의 이분적(二分的) 사고'행위가 학교 밖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학교생활 부적응, 가족 환경 등 여러 사유로 학교를 떠난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이 자신들을 향한 부정적이고 차가운 시선이다. "학생이 학교에 다녀야지…"라는 주변의 무시'편견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을 한데 모아 학교를 열려고 하자 주민들이 우리 동네에 들어오지 말라며 반대 현수막을 내걸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기까지 했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재능이 있는데도 우리 학교에선 공부란 잣대만으로 학생들을 재단한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공부 지상주의'가 양산한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다.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학교가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지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학교 안 대안교실을 통해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학업 중단 사유가 개인, 가족 환경보다 학업의 어려움 등 학교에서의 부적응, 교사'친구 등과의 관계 악화와 같은 학교생활 자체가 68.2%나 되는 만큼 학교 현장에서 이 문제를 푸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대안교육지원센터,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청소년직업체험센터 등 학교 밖 청소년들을 돕고, 뒷바라지하는 기관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이들 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학교 밖 청소년들이 "나는 외톨이" "사회로부터 고립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이들이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이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기반을 회복하도록 지역'국가 차원의 노력이 투입돼야 할 시점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시인 '흔들리며 피는 꽃')는 시구처럼 청소년들은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다. 흔들리며 크고, 일탈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인생을 살아가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손을 잡아주고, 인생이란 긴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야 한다. 수능 만점자를 더 많이 배출하려는 교육정책도 필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학생들, 끝내 제도권 교육 밖으로 이탈한 청소년을 위한 따스한 배려도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 교육이 더 나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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