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었다.
울음소리가 우렁찼기에 나도 아들로 감쪽같이 믿었던 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으면 그 다음에는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믿고 셋째딸의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었으니 당연히 딸일 거라 믿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마을의 산파로부터 "딸"이라는 말을 들은 남편은 이틀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딸 셋을 줄줄이 낳았어도 서운한 내색을 하지 않았던 남편이었는데, 넷째까지 딸인 것은 꽤나 충격이었는지 마을의 주막에서 줄창 술을 들이켰다고 했다.
방학이라 산후조리를 해준다며 온 시누 둘은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며 놀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오빠가 화났으니'하는 마음에 행동을 조심했던 듯했다.
결국 내가 아픈 배를 끌고 일어나 장작을 때서 미역국을 직접 끓였다.
제대로 먹어야만 아이에게 젖도 물릴 수 있고, 또 다시 농사철이 되면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미역국을 끓여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시누이가 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죽었나봐요"
시누이가 아이를 안고 '묻어주어야 한다'며 문을 나섰다.
남편도 주막에서 오지 않는데, 아이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시누이로부터 아이를 뺏어 안고 '아직 안 죽었어요. 내가 살릴겁니다'하고 아이를 윗목에 뉘어놓고 계속 다리를 만졌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기사회생을 한 거였다.
이틀뒤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시누이로부터 아이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애비라는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았나보다. 내 잘못이지"
덕분에 넷째도 딸을 출산했지만, 더 이상 남편은 "딸에 대한 서운함"을 표출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 둘째딸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시동생이 결혼을 하여 손아래 동서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시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도시에서 회사에 취직을 했기에 동서와 나는 명절과 시부모님의 생신때만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해마다 시댁에 토지를 늘려갔다.
시댁마을에서는 우리의 담배 농사가 큰 돈을 버는 것을 알고 담배 농사 기술을 배우려고 단체로 우리에게 오곤 했다.
그러는 동안 군에서도 남편의 담배 농사에 대한 공을 인정하고 총대라는 직함을 주었다.
총대는 담배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연합회를 대표하는 직책으로, 그때부터 남편은 면사무소와 군청으로의 출입이 좀 잦아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부터 마을까지 들어온 버스 덕분이기도 했다.
버스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읍내에서 마을까지 운행을 하여 읍내 5일장을 다니는 일도 조금 쉬워지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도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장날이면 가끔은 마을밖의 공기를 쐬보는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안 사실로는 아들이 태어난 것이 남편의 대외 활동에 날개를 달았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 10년만에, 딸 넷을 낳고서야 낳은 아들이 남편의 삶에 氣를 펼 수 있게 한 거였다.
남편 스스로는 딸 아들 구분을 않는다고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들 가진 아버지는 아무래도 어깨를 펴고 다니던 때였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시어머님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도 물론이었다.
큰 아들은 남편이 문중에서 장손으로서의 역할에 힘을 부여해준 최고의 기회였고, 시부모님의 노기를 잠재워준 이유가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남편은 문중의 행사에도 참석했는데, 문제는 이때부터 가부장적인 사고가 다시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남편은 다시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는 논리에 맞춘 언행을 하기 시작해 버렸다.
신혼초에 시어머님께서 "저놈은 결혼하더니 갑자기 여자를 귀하게 여긴다. 쓸개 빠진 놈"하면서 힐책을 했을 만큼, 애초에 남편은 장손이라는 감투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매사에 "남자니까 이 정도의 대접은 당연하다"라는 사고를 갖도록 시부모님께서 가르치셨지만, 먹고 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니 그 생각도 접고 살았는데, 아들이 태어나면서 남편은 남자로서의 헛된 자부심을 가슴속에서 다시 일깨우고 말았다.
그것은 밥상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동안 남편은 나를 포함한 아이들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농사에 쫓긴 시골 실정에서는 '밥상 두 개를 차리는 것도 일이니 그냥 편하게 살자'고 했지만,
아들이 태어나 걷기 시작하자마자 남편은 아들과의 겸상을 하겠노라 선언했다.
졸지에 나는 바쁜 농사철에도 남편과 아들을 위한 상을 따로 차리고 네 딸은 나와 함께 둥근 밥상에 앉아야 했다.
반찬도 틀렸다.
장날이면 생선이나 고기를 조금씩 사오는데 그것은 항상 남편의 밥상에만 오를 수 있는 적은 양일 뿐이었다.
딸들은 남편이 밥상을 물리면 그때서야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밥상의 차이는 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딸들은 갑자기 달라진 밥상에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대부분의 집에서는 아버지의 밥상을 따로 차릴 때라 딸들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식사를 할 때면 남편이 숟가락을 들고 내가 들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아들손에 숟가락을 쥐어주고 나면 딸들도 숟가락을 들 수 있는 위계질서가 정착되었다.
당시 마을에 파마머리가 유행을 했지만, 나만 쪽진 머리를 유지해야 했을 정도로 남편은 "남자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 외에는 그리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 또 있었다.
남편이 처갓집에 출입하게 된 거였다.
살만해진 사위가 되었으니 떳떳하게 처가를 다녔고, 덕분에 아이들도 외갓집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 아들이 태어난 2년 후에 딸이 태어났다.
사람들은 내 배를 보고 모두들 아들이라고 했기에 상당한 기대를 했지만, 딸이었다.
딸 많은 집에서 다섯째 딸이라면 구박 덩어리가 될 것이라 낳고서도 아이에 대한 걱정을 했는데, 남편은 의외로 막내딸을 아주 귀여워했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삼시세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유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넷째딸을 출산하고 이틀간 주막에 있었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마 넷째딸 출산후의 사건과 아들을 낳은 뒤에 낳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에 대한 안정만큼 담배 농사도 해마다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남편은 점점 발을 넓혀갔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대학생 농촌 봉사단]을 마을에 유치하기도 했다.
영남대학교 학생들이었는데, 방학을 맞아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빈곤한 시골 생활 환경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니, 담뱃잎의 찐득찐득함에 질려 제대로 일도 하지 못해 어찌보면 우리로서는 민폐만 되었던 봉사활동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밥도 해줘야 했고, 함께 지내야 했다.
보름의 예정으로 왔던 학생들은 결국 1주일만에 마을에서 철수를 해버렸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대학생 농촌 봉사활동을 받지 않았다.
대학생들도 담배에 진력이 났는지 학교측에서도 '봉사활동 보내줄까요?'라는 언질이 없었을 정도로 담배농사는 대학생들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집의 담뱃굴은 3개가 되었다.
왕창 따서 왕창 넣어 찌자는 것이 남편의 의견이라 더 짓긴 했는데, 담뱃굴에 넣을 나무를 공급하는 것이 난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산에서 땔나무를 하는 것이 엄격히 통제되어 지정된 곳에서만 땔나무를 할 수 있었기에 나무를 구하는 일도 힘들었다.
다행히 친정 오빠가 산판(산림환경개선 벌목)일을 하셔서 차떼기로 나무를 사올 수 있었지만, 우리가 필요한 만큼을 만족스럽게 구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실험 정신이 또 다시 발휘되었다.
어디서 사왔는지 남편은 갈탄 2차분을 사왔다.
갈탄을 사오면서 리어카라는 것도 사왔는데, 이것을 지게 대신 쓸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집 화전은 모두 산에 있어 리어카가 다닐 만한 노폭이 되지 않아 쓸 일이 없었다.
그냥 하우스가 있는 밭에만 쓸 수 있었고, 갈탄을 실어나르는 용도밖에 쓸 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만 리어카가 들어가는 밭에 쓴다면서 줄창 빌려가는 통에 남편의 실험정신은 마을 사람들만 편하게 했다.
남편이 사온 갈탄을 4자매의 고사리손을 빌려 물과 섞어 공처럼 만들어 햇빛에 말린 다음 아궁이에 장작대신 쓰게 되었다.
나무보다 오래 타니 좀 편한 것 같기는 했는데, 문제는 끊임없이 나오는 검은 연기였다.
멀리서 우리 담뱃굴을 보고 있으면 검은 연기가 계속 나와 누가 봐도 우리 담뱃굴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분진은 짚으로 덮은 지붕에 앉아 비가 오면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이 거무틔틔했다.
냇가에 물을 길어먹기 때문에 비가 오면 좋다며 처마밑에 통이란 통은 모두 가져다놓고 물을 받는데, 맑은 물이 아닌 거무틔틔한 물이라 밭에 주는 용도로밖에는 쓸수가 없었다.
물론 아이들도 불만이 있었다.
담뱃굴 아궁이를 지켜라고 하면 장작을 때면 생기는 숯불에 감자나 강냉이를 구워 먹는 재미로 군불을 때는데, 갈탄은 아무것도 구워먹지 못하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갈탄을 전부 써야 한다며 그해의 담뱃굴 아궁이는 갈탄만 땠다.
그리고 그 고집스런 갈탄 애용 결과물은 겨울에 나왔다.
다른 집 담뱃잎은 깔끔한데 비해 우리집 담뱃잎은 검은 점이 툭툭 박혀 있는 거였다.
갈탄을 땐 것이 담뱃잎을 모조리 등외품으로 만들어 버린 거였다.
결국 그해에는 갈탄 때문에 다른 해와 똑같이 일을 했음에도 수입은 3/4으로 줄어들어버렸다.
그 일을 기회로 남편은 당분간 실험 정신을 발휘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리어카가 준 편리함 덕분인지 "숙이 아부지! 요새는 뭐 색다른 거 없어요?"하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 내에서 사는 것이 최고인 것 같았다.
남편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이듬해에는 좀 조용하게 하던 그대로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조용한 그 모습을 보니 짠한 느낌이 들었다.
활개를 펴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5. 새마을 운동
큰 딸이 중학생이 되던 해.
나는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일곱번째 아이였다.
내 나이는 서른 넷이라 당시로서는 노산에 속했는데, 다행히 아들은 튼실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손아래 시누이가 결혼을 하여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시골 집에는 시부모님과 막내 시누이만 남게 되었다.
막내 시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 있는 유치원의 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해마다 사들인 농토로 시아버님은 농사에 바빴고, 시어머님은 예전의 마나님 풍모를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남편은 봄과 가을이면 유달리 바빠야 했다.
담배농사도 지어야 했고, 시댁으로 가서 일꾼을 동원하여 모내기에 추수를 하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엽연초 조합의 총대일도 했고, 이제는 큰딸이 다니는 중학교의 육성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산골짜기에서는 중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버스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만 다니니 등하교를 할 수가 없는 조건이라, 큰 딸은 시부모님께 보냈다.
손녀이니 당연히 잘 돌보아 줄 것이라 여기며 보냈지만, 시어머님은 "손녀가 여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아이를 부려먹기만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손자가 아닌 손녀를 너무 싫어하셨던 것을 잠시 잊어버린 나 때문에, 큰딸은 학교를 다니는 일보다 할머니의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갑도 되지 않으셨던 분이 왜 그렇게 고고한 늙은이 흉내를 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시어머님의 성정은 손녀들에게 좋은 평판으로 남아있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이 시어머님을 무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나중에 할머니가 되면 손자 손녀들한테 무서운 할머니는 안되어야지"하는.
다행히 지금 내 손자 손녀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좋다.
시어머님 덕분에 살아가야 할 지혜 하나는 제대로 배운 셈이다.
큰 딸이 없으니 둘째딸의 할 일이 많아져 버렸다.
천만다행으로 그때 마을에 학교가 세워졌다.
10리를 가야 하는 학교가 마을 안에 들어섰다는 것은 아이들이나 우리들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다.
비록 분교여서 4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어 5학년이 되면 10리를 걸어 본교로 가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둘째가 5학년이 되어 버려 분교가 개교한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셋째는 1학년부터 분교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둘째와 셋째가 동생을 돌봐야 했고, 청소나 설거지도 담당해야 했다.
봄이면 이제 일곱 살이 된 넷째딸까지 담배밭에 동원이 될 정도로 해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졌다.
너도 나도 담배농사를 짓는 데다가 이웃 마을에서도 '담배농사가 고추나 콩보다 낫다'는 기대감으로 담배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담배를 심는 시기가 같으니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어린 딸도 모두 밭에 동원되어 담배 모종을 놓거나 주막에서 술을 사오는 심부름을 맡아 하게 되었다.
우리집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담배를 심는 때와, 가을 수확철이 되면 학교를 결석하는 아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때 개근상을 받은 아이가 없다.
해마다 보름 정도의 결석으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기에 개근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우등상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아동 노동이 방송에서 '아동학대'라는 뉴스로 나올 일이었지만, 당시의 농촌 사정은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학교 선생님께서도 이런 형편을 봐줄 정도로 열악한 농촌 환경, 그러니까 기계가 아닌 사람 손에 의해서 100% 이뤄지는 농업이니 어쩔수가 없었던 때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걸 당연한 듯이 여기고 농번기면 고사리손이라도 보탰다.
그게 밥을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셈이었다.
넷째딸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시어머님께서는 큰아들을 시댁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남편과 의논 끝에 "손주니까 잘 돌보실거야. 매일 밭에서 헤매야 하는 우리보다는 늘 집에 계시는 어머니가 낫겠지"하면서 큰아들은 시댁으로 가게 되었다.
이제 집에는 다섯 아이가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둘째는 아들 역할로 키워졌다.
다른집에는 사내아이들이 소를 몰고 다니는데, 우리집은 둘째가 소 먹이기 담당이었다.
그 전에는 남편이 소를 몰고 다녔는데, 바깥의 감투를 많이 쓰면서 매일 소를 몰고 나갈 시간이 없었다.
둘째는 골격도 컸고 기운이 세서 웬만한 집의 사내아이들보다 농사일을 더 잘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마을 아이들과 산으로 풀뜯기를 하러 갔고, 저녁무렵이면 지게에 소꼴을 가득 지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셋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엌일 일부를 맡았다.
밥을 하고 물을 긷는 일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모두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때라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더 바빠졌다.
분교가 개교하면서 선생님께서 두 분이 오셨는데, 거주할 곳이 없는 거였다.
당시 우리 마을은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우리가 살았던 제공집만이 반듯한 기와집이라 두 분의 선생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육성회장인 것도 한 이유였다.
졸지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하숙집 아줌마가 되어 선생님 두분의 세끼를 책임지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우리집에 같이 산다!"며 좋아했지만, 내게는 정말 힘들었던 때였다.
분교에 사택이 지어지는 10개월간.
반찬을 늘 채소만 올릴 수 없어, 하숙하는 선생님 핑계로 5일장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괜찮았다.
담배등급을 분류하는 담배조리철인 겨울에는 어쩌나 했는데, 그 전에 사택이 완공되어 담배조리는 예정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기간동안 우리집 아이들이 선생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무서움에서 벗어나 친근감을 갖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때의 경험 덕분인지 우리집 아이들은 발표력이 엄청나게 늘어나,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조리있게 떨지 않고 말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이 발전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기분좋은 변화였고, 부모로서 뿌뜻함도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뒤이어 우리는 새마을 운동과 마주하게 되어 더 큰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1970년도에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고 우리 마을은 2년후에 이 운동의 열풍이 불어왔다.
산골짜기이다보니 다른 마을보다는 늦었는데, 엽연초 조합의 총대직을 갖고 있던 남편은 아주 자연스럽게 새마을 지도자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다.
한 마을에 한 명의 새마을 지도자가 지정되는 형태였는데, 남편은 우리 마을을 새마을로 바꿀 지도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감투가 포개진 거였다.
새마을 운동은 도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농촌에서는 아주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운동이었다.
일단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초가를 스레트나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이었다.
우리가 살던 마을은 제공집인 우리집을 빼고는 모두 초가집이었다.
그래서 가을 추수가 끝나면 어느 집 할 것 없이 서로 품을 팔며 초가를 이어야 했는데, 이 일은 마을전체가 치러야 하는 거대한 행사였다.
우리집도 본채는 기와였지만, 소 마굿간과 창고로 쓰는 아래채, 그리고 담뱃굴 3개가 모두 초가여서 남편이 항상 동네 품앗이에 포함이 되어 함께 일을 했다.
특히나 담뱃굴은 지붕이 높아 더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 그 일을 할 때면 밑에서 가슴을 조려야 했다.
만약 잘못해서 지붕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하는 심정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지붕을 덮기 위해 쓰는 짚은 늘 부족했다.
겨우내내 소 여물도 짚을 써야 했기 때문에, 짚이 없는 사람은 돈으로 내던지 그 대가만큼 품앗이를 더 해야 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다행히 1,000평의 논에서 나오는 짚이 있어 소 여물과 지붕 씌우는 짚은 충당할 수 있었다.
예전에 서울 근교에 있다는 민속촌엘 갔더니 초가 지붕을 씌우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분들도 모두 기술자라며 보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받는데, 나는 초가지붕 씌우는 일을 기술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아주 생소한 기술자를 만나고 온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 초가를 이던 마을 사람들도 현재는 1/3만 살아있는 형편에다, 늙어서 지붕위에 올라갈 수도 없는 형편이니 그 분들이 기술자가 맞긴 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새마을 운동은 내가 늘 가슴을 조려야 했던 담뱃굴 지붕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었다.
스레트로 씌우니 비가 샐 일도 없었다.
그때는 스레트가 마법의 지붕일 정도로 좋아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몇 년전부터 농촌에서는 '스레트 지붕 철거'를 하고 있다.
스레트가 몸에 해로운 석면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나라에서 철거를 하도록 하고 철거하는 비용도 보조해주는 것인데, 새마을 운동을 할 때 획기적인 지붕으로 사람들이 좋아했던 스레트가 이렇게 천대를 받을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그때는 초가만 아니면 무조건 좋다고 할 때였으니 그랬기도 했지만, 스레트나 양철지붕이 좋지 않은 점은 당시에도 있기 했었다.
바로 한 여름의 더위였다.
스레트와 양철지붕은 햇볕을 달구는 성질이 있어 방안에 앉아 있으면 밑은 시원한데 머리는 화끈화끈한 열기를 주었다.
그래도 해마다 초가를 새로 하지 않아도 되고, 초가가 썪기라도 하면 비가 새던 일도 없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이 가져온 마을의 또 다른 변화는 길을 넓힌 거였다.
그 전까지는 마을의 중심길만 차 한 대가 들어올 정도의 폭이었는데, 새마을 운동은 논밭으로 가는 길도 넓혔다.
그 덕분에 논으로 가는 길이 넓어져 남편이 구입했던 리어카가 제 몫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여름이면 담뱃잎을 따서 화전에서 논이 있는 길까지만 지게를 지고 오면 거기에서부터는 리어카로 담뱃굴까지 실으면 되니까 담뱃잎을 운반하는 일도 새마을운동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 마을의 여자들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까지 우리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쪽진 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은 "빨리 움직이고 쉽고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목표였던만큼 쪽진 머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쪽진 머리는 흐트러지면 가지런히 정돈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 머리를 짧은 파마머리로 하는 것이 대유행이 되었다.
나도 물도 길어야 하고 농사를 지으니 머리에 이고 다닐 일이 많아 쪽진 머리를 관리하는 것이 번거로워 파마 머리를 하고 싶었다.
특히 담뱃잎을 이고 오면 머리 전체가 찐뜩찐뜩해지면 그 긴 머리를 감는 일은 힘들었다.
짧은 파마머리라면 휙 감고 빨리 말릴 수 있어 '파마머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결사 반대를 했다.
자기는 파마머리가 싫다고, 그리고 장손집에서 경박스럽게 무슨 파마를 하느냐며 반대를 하는 통에 우리 마을에서는 나만 여전히 쪽진 머리로 지내야 했다.
바쁜 농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였는데, 남편의 성격을 아니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그때 나를 조금 편하게 해 준 것이 아이들의 학교에서 주는 무료 간식이었다.
셋째와 넷째가 다니던 학교는 골짜기 분교라는 특혜로 간식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처음에는 우유가루가 주어졌다.
미국의 원조 물품으로 요즘 나오는 전지분유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미숫가루 대신에 우유를 물에 타고 감자나 고구마를 쪄서 논밭으로 간식을 가져가니, 따로 부침개를 한다던가 하는 번거러움이 없어 좋았다.
1년간 우유를 주더니 그 다음해에는 건빵을 줬다.
조그만 봉지에 담긴 것이 아니라 봉지에 들어있지 않은 건빵을 그냥 팍팍주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벌크였다.
그래서 두 딸은 등교할때마다 책 보자기에 다른 보자기 하나를 항상 같이 갖고 가야 했다.
보자기에 건빵을 두르륵 부어주니까 다른 집 아이들도 모두 다른 보자기를 갖고 갔다.
처음에는 그 건빵을 그냥 먹었는데, 나중에는 질려서 비싼 식용유를 살짝 붓고 무쇠솥 뚜껑에 살살 볶았다.
"삼시세끼'라는 방송에서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볶음 요리를 하는 것처럼 해먹었던 셈이다.
방학때는 주지 않으니까 평소에 조금씩 아끼며 옹기에 보관하다가 담배밭에 간식으로 내어가야 했을 만큼, 건빵은 요긴한 간식이었다.
우리집 담배밭은 고개를 넘으면 되는 영양이나 청송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건빵 간식을 좋아하셨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부터는 빵을 주었다.
하루에 12개의 빵을 주었는데 우유나 건빵보다는 훨씬 좋은 간식이었다.
빵은 옹기에 넣어놓으면 여름에도 보름이 넘게 보관이 되어 "상하지도 않는 좋은 빵"이라며 먹었는데, 나중에 "방부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그 빵이 어찌보면 방부제 덩어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빵을 먹고 탈난 사람은 없었다.
셋째가 5학년이 되어 본교로 가니 빵을 타올 아이가 넷째밖에 없었다.
나는 시부모님께 가 있던 큰아들을 불러올려 분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실상은 빵을 타오는 것보다는,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셔였다.
그 전 해에 큰 아들은 지독한 홍역을 앓았다.
아들의 홍역 소식을 듣고 시댁으로 갔더니, 시어머님께서는 "잘 조리해줄테니 걱정말라"고 하셨지만, 아들의 홍역은 큰 문제를 안고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홍역을 앓는 아이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여 밭으로 논으로 모두 다녔던 거였다.
결국 큰아들은 홍역을 깔끔하게 끝내지 못해 그후로도 겨울만 되면 잔기침을 달고 사는 호흡기 질환을 앓게 되어 내가 키우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큰아들은 전기도 없는 골짜기 생활을 너무 힘들어했다.
하루에 12개씩 주는 빵도 큰아들을 잡아두지는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큰누나와 고모랑 사는 집은 전기도 들어오고 마을도 반듯반듯 깨끗하다며 골짜기 생활이 싫다고 해서 2개월만에 다시 시어머님께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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