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 나이에 뭐 하려고?

"팔순 노모가 구술하고 중년 딸이 밤을 새워 받아 적었다"는 글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매일신문에서 전국 최초로 시니어 문학상 공모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어떤 분들이 참여할까 궁금했었지요. 문학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팔순 나이에 딸의 도움을 받고 참여한 분도 있었습니다. 대상으로 당선된 박필선 할머니는 당신이 살아온 지난한 삶을 실타래처럼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딸이 밤을 새워가며 받아 적었다네요. 그 모녀의 모습이 수묵화처럼 눈앞에 그려집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딸도 어머니의 삶이 으레 간난한 줄 알았다가, 더 늦기 전에 정리해 드렸으면 했는데 마침 공모전이라는 기회가 왔는지도 모릅니다. 남편과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또 남편과의 삶을 갈라놓은 것도 담배라고 쓴 논픽션 '담배 生, 담배 別'이라는 작품을 읽으며 두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 할머니의 이력과 달리 어머님은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밭뙈기 한 평 없는 궁색한 살림으로 남보란 듯 6남매를 키웠으니 고생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어머님에게는 비밀 투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위에서 몇 번째, 앞에서 몇 번째라고 외워서 투표했고 자식의 전화번호를 물어도 적어둔 쪽지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 어머님에게 글자를 가르쳐 드릴 일이 생겼습니다. 선거나 자식들의 전화번호를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까닭이 있었던 거지요.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경로회장을 하라는데 못한다고 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셨지만, 까막눈이라는 자격지심에 거절했을 어머님의 마음이 읽혀 짠했습니다. 모임에서도 뒷자리에 앉아 박수를 칠뿐 앞에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봉사 직책이지만 그 회장이라는 직함을 안겨 드리고 싶었습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어머님이라고 못 할 거 없어요. 하세요. 저도 회장님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벌써 끝났답니다. 하루 이틀 말미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이 났다네요. 기회는 다시 옵니다. 회장이라면 최소한 당신의 이름은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며느리보다는 티격태격해도 손자와 함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사인펜과 공책을 아이에게 내밀었습니다. 마음이 상하셨는지 "이 나이에 말라꼬? 안 할끼다"며 공책을 밀쳤지만 식구들이 없을 때 한 줄씩 공책을 채워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숫자를 익혔고 당신의 이름과도 씨름을 했습니다. 추상화를 방불케 했던 어머님의 이름 석 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아갔습니다.

해가 바뀌어, 어머님은 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회장을 맡으셨고 우린 축하한다며 회장이 되면 한턱 쏘는 거라며 통닭 파티까지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님과 부대끼며 살아왔던 날이 사반세기였습니다. 딴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돌아보니 아쉬움뿐입니다. 오늘따라 금계산 자락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어머님이 무척 보고 싶습니다.

우남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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