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6월, 서대문 안에 있는 정칙강습소에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남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겠다고 나타난 주인공은 강향란(본명 강석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사상과 이상을 가지고 머리를 깎은 여자는 강향란이 처음이었다.
강향란이 단발한 사연은 무엇일까. 14세에 기생에 입문해 한남 권번 소속 으뜸으로 꼽히며 서울 화류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20세가 되던 가을, 부유한 어느 청년 문사와 사랑에 빠지면서 기생을 그만두게 된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에 부푼 그는 서울 적선동에 사는 김 씨라는 남자를 통해 글을 배우고 1921년 9월 배화학교 보통과 4학년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과 1학년에 진급했지만 갑작스럽게 자신의 학자금을 대주던 애인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생각지 못한 시련에 한강 철교 위에서 자살하려는 순간, 그에게 글을 가르쳐준 김 씨에게 발견돼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강향란은 "나도 사람이며 남자와 똑같이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뢰하고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근본부터 그릇된 일이다. 세상 모든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한 곳에 있다. 여자로서의 고통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 남자같이 살아보겠다는 의미로 22세에 시내 광교에 있는 중국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고 남자의 양복을 입었다. 당시 배화학교에서는 머리 깎은 여자는 다닐 수 없다 해서 퇴학을 당했고, 시내 정칙강습소에 다니며 공부했다. 그녀가 남자 복장을 한 사진은 동아일보 1922년 6월 24일 자에 실릴 정도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후 러시아말을 배우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뒤, 또 한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8살의 강향란은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동아일보 1926년 10월 8일 자 신문에는 강향란에 대해 '기생에서 배우까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그녀의 삶을 총 6막으로 정리했다. ▷기생을 던지고 배화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던 '공부막' ▷실연 소동을 일으켜 한강에 투신소동을 하였던 '실연막' ▷여자로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하지 않다고 사회주의에 감염돼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하고 남학교에 출석하던 '단발미인막' ▷지금의 조선 여자란 꼭 세 가지 길이 있는 바 한 길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할 길, 한 길은 춤추고 노래하며 질탕히 놀아볼 길, 또 한 길은 자살할 길, 세 길밖에 없는데 첫 길은 몸이 약하여 못 가겠고, 둘째 길은 기회가 많아 가본 길이라 다시 갈 수 없고, 나머지 셋째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음독하고 자살하려도 못 죽고 살아난 '자살막' ▷상하이, 일본 등지로 무턱대고 돌아다니던 '방랑막' ▷맨 끝으로 영화계로 나선 '배우막'이다.
당시 여성들이 감행했던 단발은 근대를 살아가는 깨인 여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남성들의 단발은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여성의 단발은 좋은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행위로 인식하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했다. 신여성을 자칭하는 여성들은 지금까지 예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긴 머리를 과감히 자를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세정(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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