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천의 문중이야기] <10>영일 정씨-태평산 명당 이야기

단종 복위 운동 실패 정종소, 김천 친구집에 뿌리 내려

정금기 영일 정씨 교리공파 대종회장이 문중의 재실 태평재와 태평사 절터에 관련한 구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정금기 영일 정씨 교리공파 대종회장이 문중의 재실 태평재와 태평사 절터에 관련한 구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비한재.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비한재.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김천의 문중이야기에서 다루는 네 번째 문중은 영일 정씨(迎日 鄭氏) 문중(門中)이다. 영일 정씨 문중은 오천(烏川) 혹은 연일(延日) 정씨라고도 불렸으나 최근 문중에서 영일로 명칭을 통일해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영일 정씨는 신라 6부 중 자산진지부 촌장인 지백호(智伯虎'신라 유리왕 9년 건국에 공을 세운 6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의 후손 동충(東沖)에게 정(鄭)씨 성을 내린다)의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지금의 칠곡군 약목호장으로 있다가 연일읍으로 이거, 연일호장을 지냈는데 이때부터 연일(延日)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영일 정씨의 시조는 정의경으로부터 7, 8대가 지난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정습명의 윗대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정습명은 고려 예종조에 과거에 급제, 문중을 크게 일으켰다.

김천의 영일 정씨 문중은 정습명의 14세 만취당(晩翠堂) 정이교(鄭以僑'1449~1498)를 입향조로 한다. 만취당이 김천으로 입향한 유래와 영일 정씨 만취당 문중의 세장지(世葬地)로 알려진 태평산(太平山) 명당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가풍(家風)

영일 정씨 김천 입향조 정이교가 김천으로 온 이유는 그의 아버지 정종소(鄭從韶)가 단종 복위 운동에 실패하면서 당시 김산군(현 김천시) 봉계에 터를 잡고 있던 친우 최선문의 집으로 피신하면서부터다.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이 스스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피(가풍)'를 물려받았다고 하는 점도 정종소의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이 있다.

정종소는 1447년(세종 29년) 문무시(文武試)에 이계전(李季甸), 강미수(姜眉壽) 등과 더불어 등과했고, 같은 해 치러진 중시(中試)에서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최항(崔恒), 정창손(鄭昌孫) 등 당대의 석학이라 불리던 이들과 동반 급제해 문명(文名)을 알렸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실권을 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55년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런 세조의 왕위 찬탈은 과거 세종'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 심각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유성원'김문기(金文起) 등의 유신(儒臣)들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했으나 실패했다. 당사자인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고, 모후인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 되고 무덤은 파헤쳐지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세조(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일어난다.

금성대군은 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 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를 거쳐 순흥(順興)으로 이배됐다. 1456년(세조 1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1457년(세조 2년) 유배된 순흥(順興'현 경북 영주시)에서 정종소와 그의 외숙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이들은 조령을 막고 제민교(濟民橋)를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모았다. 하지만 거사하기 전 관노(官奴)의 고변으로 금성대군은 안동으로 유배된 후 사사(賜死)됐다. 정종소의 외숙 이보흠은 한양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생질인 정종소의 가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외숙이 살육되자 더는 벼슬길에 머물 뜻이 없었던 정종소는 벼슬을 버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최선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김산군 봉계로 이주해 왔던 20세의 젊은 선비 정이교는 최선문의 손녀와 혼인을 하며 김산군에 뿌리를 내린다.

◆가짜 상여를 만들어 황여헌의 이목을 가리다.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의 세장지(世葬地) 태평산(현 김천 봉산면 태화리 산 44번지 일원)과 관련해 정씨 문중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구전(口傳)돼 온다.

추풍령에서부터 흘러내린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정기는 선개산과 가성산을 거쳐 한 줄기는 마암산으로 흘러갔고 또 다른 줄기는 태평산으로 흘러들었다.

대간의 정기를 받은 태평산은 호랑이가 갈대밭에서 새끼를 기르는 형국으로 이곳에 선조의 묘를 쓰면 후손이 크게 발복(發福)할 것으로 알려졌다.

영일 정씨 문중의 김천 입향조 정이교는 최선문의 손녀와 결혼해 김산군 봉계에 터를 잡았다. 김천에 뿌리를 내리고 후손을 위해 길지를 찾던 정이교는 지관들이 명당으로 추천하는 태평산 자락을 문중의 세장지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태평산에는 이미 태평사란 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율장(律藏'부처가 제정한 계율을 기록한 문헌을 통틀어 일컬음)을 보면 사찰은 도살장, 묘소, 마구간, 감옥, 술집, 유막처(有幕處, 매춘 장소)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고, 이에 따라 절이 먼저 들어선 곳에 묘소를 만들게 되면 절에서 반대할 것이 자명했다.

이즈음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울산군수(蔚山郡守)를 지낸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1486∼?)이 귀양을 와 용배 마을에 살았는데 태평산이 명당이란 말을 듣고 좋은 터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자리한 태평사가 있어 그 누구도 쉽게 묫자리를 만들 수 없었다.

명당이 탐나 스님들을 몰아낼 궁리를 하던 황여헌은 한밤중에 송아지를 절집 위에 올려둬 밤새워 울게 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태평사 스님들은 사찰에 큰 변괴가 일어났다며 해결책을 고민하다가 인근에 거주하던 황여헌을 찾아와 사연을 말하고 해결책을 물었다.

황여헌은 매우 놀라는 척하며 "스님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조짐이다"고 겁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두려움에 하나 둘 짐을 싸 태평사를 떠나고 결국 태평사는 빈 절이 됐다.

◆태평산이 문중 세장지가 된 사연은?

꾀를 내 스님들을 쫓아낸 황여헌은 절을 헐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무단으로 절을 부수기 어려웠기에 절이 저절로 무너지길 기다려야 했다.

세월이 지나도 절이 무너지지 않자 황여헌은 다시 꾀를 낸다. 동네 나무꾼과 아이들을 모아놓고 절의 기왓장에 새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새를 잡아오면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한 것. 상금에 눈이 먼 아이들이 절의 기왓장을 뒤졌고 기와가 파손된 절은 비와 바람에 무너져 사찰의 모습이 사라졌다.

때마침 정이교의 장인 최한백이 후사가 없이 상을 당했다. 후손이 없는 최한백의 상을 치른 정이교는 장인의 묘를 태평산에 마련하고 싶었다. 장인 최한백의 후사가 없기에 명당에 묫자리를 마련하면 발복이 외손으로 이어질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계마을에서 태평산으로 가는 용배 마을 앞길은 이미 황여헌이 집을 지어 살며 상여가 이동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황여헌도 정이교가 장인상을 당한 것을 알고 있기에 용배 마을 앞을 지나게 되면 분명 사단이 일어날 판이었다. 이에 정이교는 꾀를 냈다. 상여를 2개 만들어 가짜 상여는 황여헌이 살던 용배 마을 앞길로 보내고 진짜 상여는 추풍령을 돌아 태평산으로 보냈다.

가짜 상여가 용배 마을 앞을 지나려 하자 역시나 황여헌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황여헌은 상여 앞을 막고 온종일 승강이를 벌였다. 그동안 진짜 상여는 태평산에 최한백의 묘를 마련하고 달구질을 하며 '달구' 소리를 냈다.

온종일 가짜 상여와 씨름을 하던 황여헌은 달구 소리를 듣자 한달음에 태평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봉분이 만들어지고 6척에 달하는 비석까지 세워져 있었다. 명당을 빼앗긴 분을 이기지 못한 황여헌은 참지 못하고 비석을 발로 차 두 동강이 내고 자기가 살던 용배 마을 집을 허물고 연못을 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이후 태평산은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의 세장지가 됐고 가문이 크게 흥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 후손이 없는 장인을 명당에 모신 정이교의 뜻을 받들어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은 아직 최한백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문중 재실 옆에는 태평사 절터로 짐작되는 석재 기단이 존재하고 있다. 또 황여헌이 집터를 만든 못이 용배 마을 입구에 아직 전해 오고 있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이교(1449~1498)와 황여헌(1486∼?)의 생몰 연도가 겹치지 않고 황여헌이 1533년 사건으로 김산(金山) 옥에 갇힌 기록이 있는 점을 추정해 보면 구전돼 오는 과정에서 일부 첨가되거나 전승이 올바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영일 정씨 문중의 건축물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의 재실 태평재는 세조 때 홍문관교리,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한 만취당(晩翠堂) 정이교(鄭以僑)가 터를 잡고, 1569년(선조 2년)에 그의 후손 정유성(鄭維城)이 건립한 영일 정씨(迎日鄭氏) 문중의 사당이다.

태평재(太平齋), 만첨문(晩瞻門), 비한재(匪寒齋)로 구성돼 있다.

입향조 정이교의 묘 아래 이척재로 창건했으나 협소해 1780년 현 자리로 이전했다. 태평재는 凹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팔작지붕을 얹었다. 기둥에는 '만취선생시점시성전지백세'(晩翠先生始占侍城傳之百世)와 '천방처사다획기회천이일제'(天放處士多劃己回薦以一祭)라고 쓴 주련(柱聯) 두개가 걸려 내력을 알려 준다.

만취 선생은 입향조 정이교를, 천방처사는 정유성을 말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전해온다.

태평재 뒤 만첨문을 지나면 비한재가 있다. 비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집으로 실내에 영모당(永慕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신현일 기자

공동기획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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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기 영일 정씨 교리공파 대종회장

정창화 영일 정씨 교리공파 사무총장

정환민 영일 정씨 교리공파 13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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