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사연을 따라 길을 낸다. 변함없이, 말없이 흐르지만 역사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사연을 담아 흐르는 물길에는 영주 순흥의 '죽계수'(竹溪水)를 빼놓을 수 없다. 대나무가 많은 시내라고 해 이름 붙은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해 순흥마을을 휘감아 돈 뒤 선비촌과 선비문화수련원 소수서원을 돌아 흐르는 물길이다.
죽계수에 담긴 사연은 녹록지 않다. 퇴계 이황 선생이 반했다는 자연의 비경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실패해 참형 당한 영주 선비들의 애절한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죽계구곡
죽계구곡은 퇴계 이황이 계곡의 풍취에 심취돼 아홉 구비에 이름(백운동 취한대, 금성반석, 백자담, 이화동, 목욕담, 청련동, 용추비폭, 금당반석, 중봉합류)을 붙인 뒤 죽계구곡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수정처럼 맑고 차가운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에 땀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다.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죽계수는 기암괴석을 휘감아 죽계구곡에 떨어진다. 솟구치는 물방울이 마치 수정 구슬을 흩어 놓은 듯 아홉 굽이 절경을 빚어낸 죽계구곡은 안축(安軸'1287~1348) 선생의 죽계별곡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에는 주세붕, 퇴계 이황 선생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었다 한다. 2㎞에 걸쳐 9곡 이화동부터 1곡 금당반석까지 자리 잡고 있는데 1, 2, 4, 5, 9곡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제1곡 금당반석엔 아담한 폭포와 소 앞으로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다. 한여름이지만 찬바람은 여전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죽계수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기세다. 죽계구곡에 여름이 오면 미끄러져 내려가는 죽계수에 바위와 느티나무 고목들이 한데 어울려 신비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2, 3곡을 지나 4곡에 이르면 소 한가운데 둥근바위가 놓여 있다. 소에 떨어지는 물길은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모습을 닮았다 해 용추비폭이라 불린다. 5, 6곡을 지나 7곡쯤에 이르면'졸졸졸'…. 사막 한가운데 솟은 오아시스처럼 군데군데 바위틈 사이로 맑디맑은 시냇물이 흘러간다.
돌에 낀 이끼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푸르고 푸르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에 지친 몸을 식혀준다.
◆죽계제월교
죽계구곡을 빠져나온 죽계수 물길은 영주 순흥마을에 접어들고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가로지르는 죽계제월교를 지나친다. 죽계구곡에 풍류가 넘친다면 죽계제월교는 가슴 아픈 순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순흥은 '제2의 한양'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던 마을이다. 고려말에도 한강 이북은 송도라 하고 한강 이남은 순흥이라 해 남순북송(南順北松)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사방 십 리 안에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정도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줄을 이었고, 풍수적으로도 으뜸가는 곳이라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순흥의 영화는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되면서 한순간에 사라진다. 때는 세조 3년(1457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다. 순흥으로 들이닥친 관군이 사방 10리 이내의 세 살 이상 양반 남자를 모아 닥치는 대로 참형한다.
당시 참형 장소가 바로 죽계제월교였고, 수천 명의 순흥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순흥 선비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7㎞에 이어지며 지금의 안정면 동촌 1리에까지 이르렀다. 죽계천을 '핏걸'(걸은 개울이란 말의 경상도 방언), 동촌 1리를 '피끝마을'이라 달리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계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차마 못 죽이고 서울로 데려와 키운 데서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월교라는 이름은 정축지변이 있은지 253년 뒤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한 것. 장맛비가 걷힌 뒤 맑은 하늘 같은 선비의 기운이 감돈다는 뜻이다.
훗날 선비들은 '개성 송도에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부르며 충절의 다리로 기억했다. 죽계제월교를 지난 죽계수는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휘감아 돌며 순흥의 아픈 역사를 다시 어루만진다.
◆선비촌
소슬바람에 실려 귓전을 울리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 그윽한 솔 향기가 코를 자극하는 영주 선비촌과 선비문화수련원. 정연한 골기와와 가지런한 볏짚을 엮어 얹은 기와집과 초가집, 남정네들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여인네들의 공간인 부엌, 대청마루, 초가와 저잣거리….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은 새롭다. 유교의 본향 영주 선비들의 삶과 서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민족 정신문화의 중심마을이다.
독특한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500년간 사회 정치 경제를 이끌던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삶의 자세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으로 혼란한 가치관을 다 잡을 수 있는 곳이다.
콘크리트 문화에 찌든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과거로의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수확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는 전국 최대 규모 '선비촌'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영주 순흥면 청구리 소수서원 옆에 조성된 '선비촌'은 부지 총 5만6천여㎡(1만7천여 평)의 규모에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명물이다.
경북 북부에 흩어져 있던 고택과 정자, 성황당 등을 이건하거나 본떠 7년여에 걸쳐 건립한 매머드급 민속촌으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과 초가 등 12채의 숙박동, 강학당'정자'누각'원두막'상여집 등과 저잣거리까지 모두 40채의 옛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규모도 규모지만 선비촌 최고의 묘미는 가족과 연인이 함께하는 다양한 전통체험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토담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농사일을 체험하고 전통복식 입어보기, 예절과 선비정신, 서당, 다례교육 등 옛 선비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경험해볼 수 있다. 또 상설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투호던지기와 널뛰기,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와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연 만들기 등 전통문화 체험도 가능하다.
볼거리도 다양하다. 옛날 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저잣거리에서는 실제 난장과 토속음식점, 특산품점 등이 운영된다. 특히 토속음식점에서는 인삼, 사과, 한우 요리 등 영주만의 별미도 맛볼 수 있고, 저잣거리의 푸근한 인심도 덤으로 받을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덕망과 절의를 본받고 영주 선비의 사상과 삶도 배울 수 있다.
◆소수박물관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를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 및 정축지변과 관련된 유적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유교전문박물관이다. 부지면적 1만4천143㎡, 연면적 3천215㎡ 규모에 5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시청각실을 갖추고 있다. 3만여 점의 유교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매년 유물 구입과 기증을 받고 있으며 소장 유물의 순환전시회도 갖고 있다. 매년 문중유물 특별전을 기획, 올해로 10회째를 맞는다.
더불어 학술총서 발간사업도 꾸준히 해 오고 있어 지난해 15권이 발간됐다. 소수박물관은 5개의 전시실로 꾸며졌다. 제1전시실은 영주의 역사를 알 수 있게 꾸며져 있으며 제2전시실은 유교 관련 유물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저서와 간찰 등이 전시돼 있다. 또 소수서원이 사액서원이 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코너가 있다.
제3전시실은 향교와 서원을 각각 대비하고 있고 공립교육기관인 향교와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의 차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제4전시실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던 각종 유물과 영주 출신 학자들의 문집을 전시해 놓았을 뿐 아니라 김항회 기증유물도 함께 전시돼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김흠조 부부묘에서 출토된 목관을 재현해 설치해 놓았으며, 순흥바느레 고분과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 선돌 및 부사 선정비 등 여러 가지 석조물들을 전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예로부터 영주는 '해동(海東)의 추로(鄒魯)'라고 일컬어졌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은 맹자가 태어난 추 지방과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를 합친 말이다. 영주를 해동의 추로라고 부른 것은 대한민국 대표 선비 안향 선생과 퇴계 선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선비들의 삶과 지혜가 묻은 유물들이 잘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주 마경대 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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