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민족적 자긍으로 여기는 '반만년 역사'의 사료적 근거는 삼국유사다. 일연 스님의 이 사서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단기 2333년' 역사는 중국 변방의 역사로 휩쓸려 버렸을 것이다. 이 위대한 사서의 저술 공간이 대구경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자부심은 더 커진다. 대사의 시선이 머문 곳, 발길이 향했던 곳이 역사가 되고 집필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가 '웅도(雄道) 700주년'을 맞아 군위군, 국학진흥원과 함께 국책사업으로 삼국유사 목판 판각 사업을 추진한다. 현재 여러 종류의 삼국유사 판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목판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1차 사업으로 조선 중기 판본의 기준이 되는 서울대 규장각본을 기준 본으로 정해 이번에 목각판으로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국가적 프로젝트에 7명의 전문 각수(刻手'판각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전국에서 선정된 전문 장인들이다. 이 중에는 경북 출신 각수도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군위 웅산서각연구실의 김승환(56) 씨와 고령의 목판화가인 박웅서(45) 씨다. 두 사람 모두 15년 이상 서각 작업에 몰두해왔고 까다로운 제작 시연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했다.
역사적인 '웅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셀렘에 수면시간이 현저히 줄었다는 두 각수를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만났다.
◆일연 스님의 저술 복각 참여 큰 보람
일찍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전념했던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고르라면 삼국유사를 택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위인들이 극찬한 사서를 목판으로 복원하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두 사람에게 목판 복원 소감을 물어보았다가 김승환 씨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2, 3년 전부터 삼국유사 목판 제작을 개인적으로 추진해왔다는 것이다.
"목재를 사 모으고 사료를 뒤지며 작업장을 물색하던 중 목판 복원 소식을 들었어요. 너무 기뻐서 한달음에 응모원서를 넣었어요. 웬만한 어려움은 다 해결해 나가겠는데 학술적 고증, 사료적 검증에서 막혀 고심 중이었거든요." 김 씨는 대구예술대에서 서예를 전공하다 서각에 빠져 15년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 서각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생업까지 희생해가면서 이 일에 뛰어든 박웅서 씨의 각오도 남달랐다. 고령에 살면서 현재 대구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각수로 선발되자마자 본업을 뒷전으로 물리고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평소 부인사, 인각사를 답사하면서 일연 스님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땐 그저 관광수준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향토 위인의 저술을 내 손으로 직접 새기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박 씨는 취미로 서각에 입문했지만 동호회 모임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지역 서각 명사들을 사사하며 어느덧 장인(匠人)의 반열에 올랐다.
◆도감에서 표준 서체'양식 마련
5권 2책으로 돼 있는 삼국유사는 모두 219쪽(임신본 기준)이다. 이번 제작도 임신본(壬申本)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펼침면으로 새길 경우 110판으로 맞춰질 예정이다.
목재는 주로 돌배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등이 주로 쓰인다. 김승환 씨는 "돌배나무는 재질이 단단해 타각(打刻)이 힘들고 구하기도 힘들어 주로 산벚나무를 쓴다"고 말한다.
옛날 경판작업을 할 때는 해충이나 틀어짐 방지를 위해 바닷물에 몇 년씩 담가 두곤 했지만 지금은 훨씬 간편해졌다고 한다.
박웅서 씨는 "요즘은 주로 목재를 수증기로 찌거나 자연건조해서 쓴다"며 "사용될 목재들은 모두 함수율(含水率)검사를 해서 물기가 많은 나무는 작업에서 제외시킨다"고 말한다.
목재의 선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목판 양식의 통일이다. 이를 위해 제작을 총괄하는 목판사업팀에서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자문위 심의를 거쳐 표준 규격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여러 명의 각수가 유사한 기법으로 원본과 가장 가깝게 새기는 일이다. 각자 통일된 사본(寫本)을 가지고 제작을 하지만 각수마다 조각의 각도나 깊이, 획의 처리가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각수들을 불러 모아 오랫동안 합숙시키면서 서체를 통일했다.
도감에서는 워크숍을 개최해 각자 서체의 통일을 강조하고 시범 제작, 훈련까지 마쳤다. 김승환 씨도 "작업에 들어가면 개인의 테크닉이나 기교는 모두 무시되고 오직 정본의 필체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한다.
◆"내가 새긴 한 획이 역사의 한 장 장식"
붓이 주는 부드러움과 칼이 주는 날카로움이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서각. 이제 곧 각수들의 작업장에서는 경쾌한 타각음이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목판사업팀에서 준비를 끝내면 각수들은 개인의 파트, 분량을 할당받아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작업 공정을 들여다보면 먼저 목판 위에 풀칠하고 사본을 뒤집어 붙인다. 이렇게 해야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게 된다. 풀이 마르면 유채기름을 발라준다. 기름을 칠해야 글씨가 선명해지고 나무가 부드러워져 작업이 쉬워진다.
이제 각수들은 한 획, 한 자씩 새기는 작업에 들어간다. 박웅서 씨는 "옛 선조들은 '일자일배'(一字一拜'한 자 쓰고 한 번 절함)의 정성으로 작업을 했다"며 "내가 새긴 한 획이 역사의 한 장이 된다는 자세로 작업에 집중하겠다"고 말한다.
서각 역사 1천300년 동안 도구나 장비의 진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목판작업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를 말해준다. 1천 년이 넘게 같은 목재에 같은 칼, 같은 환경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승환 씨는 "칼 잡는 법인 집도(執刀)나 칼을 움직여 나가는 운도(運刀)까지 옛 기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각수들이 목판에 매달려 하루 종일 작업할 수 있는 양은 약 4줄 정도. 글자 수로는 50~80자 정도다. 밤늦게까지 작업을 연장하면 100자 이상도 가능하겠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최적량만을 작업한다고 한다.
자칫 갓머리 변의 삐침 하나라도 잘못되면 판 하나를 버려야 하는 긴장 속의 작업이지만, 두 사람이 이 일을 자청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일연 국사의 혼이 서린 구도서(求道書)이자 한국 고대사의 명저술을 새기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저희가 파는 것은 지역의 자부심이요, 우리가 새기는 것은 민족적 자긍이기 때문입니다."
글 사진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삼국유사 저술 배경은 대구경북…지역민으로서 큰 긍지입니다"
- 목판사업 총 지휘 김용만 도감
"삼국유사는 대구경북을 배경으로 저술된 학술적 성과이자 한국고대사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런 명저(名著)가 늦게나마 목판으로 복원되게 되어 사학도로서 큰 긍지를 느낍니다."
경북도청 문화재과장과 문화재정책자문관을 거쳐 이번 목판사업팀의 도감을 맞게 된 김용만(62'사진) 박사를 만나 소감을 들어봤다.
-이 사업의 추진 계기는.
▶이 계획은 김관용 경북도지사께서 직접 구상을 한 사업입니다. 2013년도 '도민현장탐방' 때 군위군을 방문한 김 지사께서 목판 복각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사업이 구상됐고, 이번에 결실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왜 삼국유사인가.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대라는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반만년이라는 우리 역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대사의 활동 무대와 사료 수집 공간이 대부분 신라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 정보가 많이 실려 있어 지역민의 긍지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사관의 특징은.
▶삼국사기가 중국 기전체(紀傳體) 사서 형태를 지닌 데 비해 삼국유사는 저자 나름의 편찬의지에 따라 다양한 주제별로 서술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술 당시 몽골의 식민통치, 폭압 정치를 겪으면서 멸실 위기에 있던 역사의 진면목을 기록함으로써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대사의 민족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사업 내역을 설명해 달라.
▶올해 '임신본' 판각이 완성되면 도청이전 준공식 행사에 소개한 후 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관하게 됩니다. 내년에 제작되는 '조선 초기본'은 군위군 삼국유사 테마파크에, 2017년 제작되는 '경상북도판'은 경북도청 역사자료관에 보관할 예정입니다. 또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은 다큐멘터리,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보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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