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공화국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는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보통 '공화국' '공화정'이라고 하면 왕정이나 독재정과 대립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민주국가'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②항이 ①항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라고만 해도 되기 때문에 '공화국'이라는 말은 잉여적 표현에 가깝다. 그렇지만 헌법에서 '민주'(民主)라는 말과 별도로 '공화'(共和)라는 말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법률가들이 대한민국을 규정하면서 '민주'와 '공화'를 함께 쓴 이유는 이 둘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체제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리스어의 'demokrati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demo'(대중)와 'kratia'(지배) 두 낱말이 합쳐진 것으로 '국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공화주의나 공화국은 로마의 정치 체제에 뿌리를 둔 것으로 라틴어의 'res publica'를 번역한 것이다. 공화(共和)는 한자 그대로 '여럿이 화합한다'는 뜻이므로 공화국의 정신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중국 주나라의 여왕(厲王)이 폭정을 하다 쫓겨나고 일부 제후들과 대신들이 왕을 대신하여 집권하던 시기의 연호가 '共和'였으므로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 res publica에 더 적절한 번역어를 찾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공동체'가 될 것이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히 때가 되면 투표를 해서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주의에서는 개인들의 사적 영역과 의사 결정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공동체를 위해 일정한 의무를 지고, 연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덕성'이 강조된다. 공동체를 위한 의무와 덕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법치주의도 공화주의 안에 모두 통합이 되었는데, 어떤 권력이든지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공동체나 구성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도록 한 것도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이야기를 한다면 공화국의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공동의 선(善)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익에 집착하기보다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먼저 걱정하는 덕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항상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한다.(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체제가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여럿 모여 살다 보면 개인 간의 이익이 충돌하기 때문에 화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그렇지만 공화국은 공동체를 위해 조금씩 양보할 수 있는 국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세금을 적게 내면서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세금도 많이 내고, 의무는 많이 지면서도 국가로부터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경로 우대 혜택은 안 받아도 좋으니 그 돈으로 아이들 밥은 제대로 먹여야지."라고 말하면 "어르신들 모시기 위해 저희가 좀 더 희생하겠습니다."라고 화답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바로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소설 '아우를 위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공화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능인고 교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