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침묵의 벽

이태수(1947~ )

침묵의 틈으로 앵초꽃 몇 송이

조심조심 얼굴을 내민다

그 옆에는 반란이라도 하듯

빨간 튤립들이 일제히 꽃잎을 터뜨린다

가까이 다가서듯 솟아 있는

성당 종탑에는

발을 오그린 햇살들이 뛰어내린다

한 중년 남자가 저만큼 간다

헐렁한 모자에 얼굴 깊숙이 파묻은 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걸어간다

나는 잃어버린 말, 새 말 들을 더듬으며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

침묵은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가고

봄 아침은 또 어김없이

그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빗장은 요지부동, 안으로 굳게 걸려

문을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새 말, 잃어버린 말 들은 여전히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전문. 『침묵의 결』. 문학과 지성사. 2014)

"언어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말한 것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침묵의 벽'은 시인이 서 있는 경계이고 전선(戰線)이다. 침묵의 틈에서 배어 나온 '그 무엇'은 앵초꽃과 빨간 튤립, 발을 오그린 햇살 등으로 기호화되지만 그것은 '그 무엇'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물론 시인은 이쪽과 저 너머가 소통될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나 이원론자가 아니어서 꽃들과 햇살(이라는 언어)을 통해 그 삶의 비밀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시인에겐 이중의 노동이 필요하다. 침묵의 벽에 들러붙어 배어 나오는 그 무언가에 잠기기,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이것은 시공간적 선후나 배치가 아니다.)

(「서녘 하늘」 부분) 그런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비, 이 삶 너머의 그 어떤 것? "세계의 한계에 대한 느낌,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것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을 때 이 신비는 이 삶 너머를 이야기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침묵의 소리는, 이 치열한 삶의 시장 속으로 되돌아가 그곳에 서 있을 때 더 잘 들리는 것은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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