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이수동 화백

"가을동화는 인생의 전환점…싸이월드로 유명세 탔죠"

▷1959년 대구시 동구 신암2동 출생 ▷대구 신암초
▷1959년 대구시 동구 신암2동 출생 ▷대구 신암초'청구중'영신고 졸업 ▷영남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드라마 가을동화 글자체와 그림 ▷드라마 겨울연가'여름향기'봄의 왈츠 글자체 제작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이수동(56) 화백.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부에 들어가 상을 휩쓸었다.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고 부회장이 됐다가 다음 학기엔 말을 잘 못해 부회장을 내주기도 했다.

그림은 그에게 전부다. 그림으로 아내를 만났고, 그림으로 가을동화를 만났다. 가장의 체면 때문에 서울행을 감행, 죄수처럼 좁은 방에서 죽기 살기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미술애호가들은 보답했다. 전시회 그림마다 '완전 매진' 기록을 세우며 서울 입성 2년 만에 국내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섰다. 이 화백의 상경기(上京記)와 화가론을 들어봤다.

◆버팀목, 송아당과 노화랑

1989년 대학원을 졸업한 이 화백은 아내가 운영하는 '어린이 미술실' 뒷바라지를 하고 짬나는 시간에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내는 미대 후배였다. 2년 동안 막막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독일 유학을 결심했고, 신혼 초 별거를 걱정한 처가에서 화실을 구해주며 유학을 말렸다. 1992년 화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첫 기회가 왔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 대표가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대구의 젊은 작가를 찾았다.

노화랑은 그해 가을 이 화백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한 뒤 980만원을 입금했다. 이 화백이 이전에 처음 가진 두 차례의 전시회에서 각각 받은 돈의 5배였다.

그는 "이때부터 가르치던 아이들을 다른 화가에게 소개해준 뒤 화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다"고 말했다. 서울 전시회 성공 소식을 들은 대구의 화랑이 잇따라 이 화백을 찾아왔고, 가장 먼저 온 송아당화랑과 손을 잡았다.

이후 매년 한 차례씩 노화랑과 송아당화랑에서 번갈아가며 전시회를 가졌다. 비록 최근에 결별했지만, 20년 이상 인연을 맺었던 두 화랑은 그림 인생의 밑바탕이자, 버팀목이었다.

◆그에게 찾아온 '가을동화'

2000년 가을동화는 두 번째 기회였다. KBS는 서울의 몇몇 화가와 대구의 이 화백에게 드라마에 맞는 그림 슬라이드 20개와 제목 글자체 샘플 10개를 요청했다.

그는 당초 요청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글자체 50개, 슬라이드 100개를 준비해 갔다.

"느낌이 왔어요. 뭔가 기회가 될 것 같아 꼼꼼하고 세밀하게 준비했더니, 채택됐지요."

가을동화 주인공 송승헌은 당초 직업이 의사였지만, 제작진은 의약분업에 따른 의료대란 사태로 의사 이미지가 나빠지자 시청률을 의식해 직업을 화가로 바꾸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송승헌의 화실과 전시회 그림은 모두 이 화백의 것이다. '이수동의 가을동화'였던 셈이다. 이후 드라마 겨울연가, 여름향기, 봄의 왈츠 등 제목 글자체도 그의 몫이었다.

◆"서울서 돈 벌어올까" 반 농담이 현실로

가을동화 이후 이름이 꽤 알려졌지만, 생활은 여의치 않았다. 1년에 한 차례의 전시회만 고집했고, 수익은 1천500만원 안팎이었다. 아내에게 주는 월 생활비는 고작 50만원이었다.

어느 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무심코 "서울에서 돈 좀 벌어올까?"라고 툭 던졌는데,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한 달쯤 뒤 아내는 "안 올라가요?"라고 했다. 결국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서울행을 결심했다.

친한 친구와 컬렉터 등 20명에게 편지를 썼다. '더 큰물에서 꿈을 펼치겠다. 서울 올라가니 응원을 부탁한다. 화실 문을 열어놓겠다'는 요지였다. 서울에서 작은 방이라도 얻을 생각에 1주일간 화실을 개방했다. 편지는 20통이었지만, 40여 명이 찾아왔다. 액자화한 그림은 모두 나갔다. 약 5천만원이 모였다.

◆1008호 죄수, 죽기 살기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4년 2월 말 트럭에 그림을 싣고 경기도 일산의 자그마한 오피스텔로 향했다. 대구 생활비를 빼고 3천만원이 전부였다. 화랑이 있는 인사동과 접근성이 좋으면서 서울 도심과 떨어진 싼 지역이었다.

보증금 1천만원, 월 80만원의 18평 오피스텔 1008호. '이 돈 떨어지면 내 인생 끝이다'라는 각오였다. '나는 1008호 죄수다'라는 격문을 거실에 붙였다. 감방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외출도 마음대로 가능했기에 최고의 대접을 받는 죄수라고 생각하며 작품에만 전념했다. 밥 먹고 그림 그리기를 반복했다. 죽기 살기였다.

◆서울 유명세의 단초, 싸이월드 배경그림

2000년 중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가 유행했다. 특히 스킨(미니홈피 배경 디자인)용 캐릭터 그림이 1장당 500원씩 도토리로 결제됐다. 서울의 한 화랑과 연결해 스킨용 캐릭터 그림 10여 개를 납품했는데, 인기가 높았다. 초창기 개런티 월 30만원이 주 수입원이 됐다.

이 유명세를 타고 출판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림 72점을 시집에 올렸고, 책은 동화 같은 그림의 영향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서울 화단에 '화가 이수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박 느낌, 연이은 'Sold out'

서울 온 지 2년(2006년), 미술시장 판도가 뒤집혔다. 초 호황기였다.

노화랑은 '1집 1그림 갖기 운동'(100만원으로 명품그림을 얻을 수 있다) 기획전에 나섰다. 호당 25만원의 이 화백도 4호짜리 50점을 냈다.

전시회 개막 전날 취재 온 사진기자는 "어? 이 그림 알아요, 선생님. 저하고 싸이 1촌이잖아요"라고 한 뒤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게재했다.

전시회 개막일 화랑 대표와 점심이나 할 요량으로 택시를 타고 가다 전화하니, "화랑으로 오지 말고 화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림 50점이 오전에 모두 팔려나간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했다. 화랑 대표는 그림을 더 그려올 것을 주문했다. 이전엔 밥을 직접 해먹었지만, 그때부터 시켜먹어야 했다. 열흘 동안 25점을 더 그렸고, 전시회에 내놓은 75점은 모두 팔렸다.

몇 달 후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42점을 출품했다. 개막식 반나절 만에 그림이 모두 팔렸다.

'이수동, 1집 1그림 기획전 이후 몇 달 만에 또 sold out'이란 기사가 일간지 문화면을 장식했다. 이즈음 큰딸은 이화여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겹경사였다.

그는 "전시회 끝나고 넓은 전세 오피스텔로 옮긴 뒤 아내를 불렀다"고 했다. 이후 '매진' 행진은 계속됐고, 호당 그림 값은 1년 사이 두 배로 올랐다.

그는 "이렇게 그리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에 호당 가격을 무리할 정도로 올렸는데도 계속 팔렸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림이 제일 시원찮았던 것 같다. 너무 급하게 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인물과 어둠에서 풍경과 밝음으로…李화백 화풍 변화

이 화백의 그림은 ▷인물과 어둠에서 ▷풍경과 밝음으로 경향이 바뀌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한 뒤 인물에 천착했다. 인물화는 그의 표현대로 '뭉크 류'였다. 이마와 인상은 찌그러지고 우울하고 어두웠다.

그는 "1990년 대구에서 60호짜리 인물화를 사간 한 컬렉터로 인해 그림의 경향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이 컬렉터가 어두운 표정의 인물화를 거실에 걸어놓았는데, 아이가 밤에 거실을 지나 화장실로 가다 그림이 무서워 울고불고했다는 것이다. 좀 더 따뜻한 그림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 이후 이 화백의 인물은 풍경의 배경으로 자그마하게, 그것도 뒷모습이나 옆모습 위주로 표현됐다. 그는 아직도 인물을 그리지만, 어두운 인물은 장롱 속에 처박아 둔다.

"순수한 백지상태의 아이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는 그림이, 고착화된 어른의 마음에 어떤 감흥을 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인물보다 밝고 쾌적한 풍경화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뽀송뽀송하고 따뜻하다'고 표현한다. 자작나무와 맑은 구름, 바다와 모래, 꽃, 시골길, 연인 등이 주 소재다.

그는 "예전에 밝고 어두운 그림이 반반이었다면, 지금은 9대 1"이라며 "그림은 보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병구 기자

◇"화가는 그 옛날 변사와 같지요 남을 즐겁게 해줘야하니까요"

"컬렉터가 그림을 샀을 때 그 그림으로 인해 즐겁고 감동을 받거나, 산 가격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면 만족하지 않겠습니까."

이 화백은 화가를 옛 무성영화 시절 '변사'에 비유했다.

그는 "화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의 훈장이 아니라 남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변사와 같다"고 말했다.

화가는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소리를 내가 그림으로 대신 표현해줄게."

사람도 만나면 즐겁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처럼 그림도 관객과 컬렉터에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또 정성을 더 들이거나 힘들고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혼을 쏟은 그림일수록 관객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주고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김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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