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두 번째 치른 조합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모르는 사람들은 '왜?'라고 말했지만, 옆에서 본 나는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꼿꼿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은 첫 번째 선거에서는 단돈 150만원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리고 두 번째 선거에는 200만원을 지출하겠노라 공언했는데, 문제는 상대방의 선거 전략이 남편의 선거 전략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
이른 바 돈 선거였는데, 남편이 지출할 비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문중에서는 남편에게 '우리도 돈을 좀 풉시다'며 건의를 했지만, 남편은 단칼에 그 말을 잘라버렸다. "돈 써서 당선되라고? 그러면 당선되고 나서 선거비용 뽑느라 내가 뒷돈을 챙기고 싶을 건데 그건 안 되는 말이지. 사람들이 정신이 똑바르다면 돈하고 상관없이 투표할거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의 착각이었다. 돈을 전혀 쓰지 않은 남편은 선거에서 떨어졌고, 그 일로 남편은 "썩었다. 세상이 썩었다"며 한탄을 해댔다. 그 한탄에는 술과 담배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 늘어난 주량과 흡연량에 옆에 있는 사람까지 두통이 생길 지경이 되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두 며느리가 와서 사정을 하고서야 "알았다"고 대답을 했지만, 술과 담배는 줄어들지 않았다.
대신 세상이 썩었다는 식의 한탄을 하지 않고 군의 역사를 정리하는 문화원 일에 매진했다. 월급이 없는 일이었지만 거기에라도 매달리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문화원장 직책을 맡으며 남편은 더 바빠졌다.
나는 남편이 조합장을 할 때부터 듣게 된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드디어 익숙해져, 남편과 함께 하는 부부동반 자리도 어색하지 않게 참석하는 노련미를 갖추게 되었다.
남편은 서서히 선거의 후유증에서 벗어났고, 사랑방에는 다시 예전처럼 많은 이들이 찾아와 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시끌벅적함이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고 없는 집에 훈기를 주어, 그때부터는 손님이 오는 것이 반가워 식사 한 끼라도 정성스럽게 챙겨서 들여보냈다. 모든 것이 안온의 상태를 유지해주었다.
허나, 잠시였다.
안온한 삶은 한때였고, 남편의 쓰러짐은 급작스러웠다. 집 근처의 병원에서는 자신이 없다고 하여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남편의 쓸개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쓸개를 떼 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여, 아이들을 불러 서류에 서명을 하게 했다.
서류에는 '만약에 죽더라도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조항을 보면서 '어쩌면 남편이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남편의 나이는 고작 예순 아홉인데 너무한다 싶었지만, 하늘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수술을 하고 남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면회는 하루 두 번. 중환자 보호자실에 상주하면서 면회시간이면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은 말을 할 줄 몰랐다.
의식이 없는 상태. 병원에서는 자식들까지 호출하는 임종 호출을 세 번이나 했다.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새벽길을 달려오면 남편은 상태가 호전되었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이런 상태라면 남편이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말로 희망을 주셨지만, 한 번씩 임종 호출을 할 때마다 내 심장은 쪼그라들어갔다.
20일간의 중환자실 생활 끝에 생환한 남편은 일반실로 옮겨졌다.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멀건 죽일망정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만이라도 유지된다면 평생을 병원에 있어도 고맙다 싶어 눈물이 나왔다.
남편은 일반실 생활 보름 만에 퇴원을 했다. 그와 동시에 담배를 끊었다. 끈질긴 담배와의 인연을 끊은 거였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피웠던 담배는 엑스포였다. 순해서 몸에 해롭지 않을 거라고 피웠지만, 의사선생님께서는 순해도 몸에 해로운 것은 같다고 말씀하셨고 끊으라고 하신 거였다.
남편의 마지막 담배가 엑스포여서인지, 나는 요즘도 OO엑스포라고 하면 남편이 피웠던 담배가 먼저 생각난다.
9. 새로운 출발의 끝
퇴원한 남편은 '덤으로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야겠다!'며 사업을 구상했다.
이전에 조합장을 할 당시, 남편은 지역 전체에 버섯재배를 주도했고 성공을 했었다. 그런 이력 덕분인지 군에서는 '버섯종균사업'을 남편에게 추천해주었고, 정부 융자를 받는 것까지 대행을 해주었다.
그러나 남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이었다.
아이들이 '아버지! 그냥 논밭을 임대해서 나오는 소출에다가 자식들이 드리는 생활비로 지내세요. 이제 무슨 사업을 해요?'하면서 뜯어말렸지만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내 사업도 해봐야지. 병원에 있으면서 결심한 일이다."
남편은 군청 직원과 함께 부지를 섭외했고, 융자받은 돈으로 설비를 하나 둘 들여놓았다. 자격증이 있는 공장장도 채용하고, 종균작업을 해 본 아줌마들도 다섯 사람을 채용했다. 남편의 인맥이 넓으니 영양과 청송에 울진까지 판매처를 뚫어 처음에는 쏠쏠하게 운영을 할 수 있었다.
3개월마다 갚아야 하는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를 갚고도 생활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1년밖에 가지 못했다. 근처에 다른 종균 공장이 들어서면서 경쟁체제가 되었는데,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공장장이 그만두겠다는 거였다. 결국 보수를 올려주고 공장장을 잡긴 했지만, 남편이 젊은 공장장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공장이 꾸려져야 했다. 공장장의 '종균이 제대로 된 것인지도 테스트 할 겸 재배로 돈을 벌자'라는 의견에 따라 공장의 빈 부지에 느타리버섯 5동을 설치했다. 느타리버섯 재배 동을 만들면서 우리는 공장의 사택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새벽 2시부터 버섯을 따고 포장을 해야 새벽 다섯 시에 오는 차편으로 공판장에 내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위해 공장에 일하는 아줌마들에게 '새벽에 출근하세요'라고 할 수 없으니, 온전히 남편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남편의 나이는 일흔 하나였고, 내 나이도 예순 여덟이었다.
버섯을 따려면 사다리를 딛고 3층으로 되어있는 버섯을 따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고되었고,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도 관절에 무리가 갔다. 그런데다가 처음에는 남편이 새벽에 함께 일어나 거들다가 날짜가 조금씩 지나면서 점점 손을 떼는 거였다.
나는 혼자서 새벽 2시에 일어나 버섯을 따고 포장을 해놓으면, 남편은 새벽 5시쯤에야 일어나 공판장에 갈 트럭이 오면 실어주는 것이 고작인 일상이 이어졌다. 1년을 그렇게 하고 나니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봄가을로 관광버스를 빌려 해마다 단체 관광도 가는데 버섯 때문에 그것도 못가고, 겨울이면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 재미있게 밥도 해먹고 지내는데, 나는 공장 사택에서 안달복달 버섯이나 따고 공장 직원들 점심을 해주는 생활이니 피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결국 둘째 네가 공장으로 합류했다. 남편과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공장 사택은 둘째 네가 거주를 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사는 일이 힘들던 차에 잘 되었다며 들어온 둘째 네는 부지런했고, 목표가 있었다. 종균 자격증도 따고 영업을 위해 울진과 영덕, 청송으로 다니며 안면을 익히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이 공장을 운영할 때보다 원활하게 굴러가는 것이 둘째 네의 월급을 주는 것을 걱정했던 일도 기우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둘째 네의 부지런함과 뚜렷한 목표가 공장장의 비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공장장은 둘째 네가 종균 자격증을 따면 자신은 내쳐질거라 생각을 했는지, '미리 그만둘랍니다'하면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종균을 생산해야 하는 시기에 사표를 던져 버리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종균사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 올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종균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도 드물어 우리는 결국 그해의 종균 생산은 막대한 시설비 투자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야 했다.
종균 생산을 못하니 수입이 확 줄어들어 버렸다. 다섯 동의 느타리버섯이 수입의 전부이니 공장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 남편이 일하는 아줌마들에게 '종균을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로 이야기를 하고 일단은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이제 공장에는 둘째 네만 남았다. 도시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온 탓에 둘째 네는 꼼짝을 하지 못하고 느타리버섯 재배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정부에서 받은 대출이 연체되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자식들에게 손을 벌려 원금은 제쳐놓고 이자만 납부하는 식으로 끌고 나가게 되었다.
자식들은 '그냥 공장을 폐업하는 것이 낫겠어요'라면서도 남편이 요청하는 이자는 꼬박꼬박 입금을 시켜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공장을 폐쇄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부담도 주지 않고 더 좋았을텐데, 괜한 희망을 가지고 자식들의 돈을 축내지 않았나 생각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준 남편의 병으로 일흔에 시작한 사업은 3년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깨가 아프다."
"자꾸 기침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자신의 몸 상태를 얘기했다. 병원에서는 '감기입니다. 푹 쉬세요'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감기라서 다행이다 싶어 꿀과 배를 이용한 감기약을 집에서도 계속 만들었다. 하지만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남편의 기침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먹은 것을 토하는 증세가 겹쳐졌다. 할 수 없이 포항에 사는 딸을 오라고 하여 CT를 촬영했다.
"폐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담배를 끊은 지 5년이나 지났는데' 하는 내 혼잣말에 선생님은 '담배는 끊고 나서도 10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5년이면 암세포가 자라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며 담배가 원인임을 지적하셨다. 남편과 함께 사위의 차를 타고 도시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면서 기대를 품었다.
'폐암일 가능성이지 폐암은 아니니까 분명히 잘못된 진단이라고 말해줄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거기에다 9월의 뒤늦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떨렸다. 남편은 뒷좌석에 기대어 가면서 두 눈을 꼭 감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극심한 공포감 때문이었을게다.
대학병원에서는 PET-CT를 찍었다. 우려했던 폐암, 그것도 말기였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환자에게는 알릴 겁니까?'로 진단을 말씀해주셨고, 나는 남편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알릴 거라고 대답을 했다.
"6개월 남았습니다."
단 6개월. 그 동안에 남편은 고단했던 삶을 정리해야 했다. 하고자 하는 욕심은 많았지만 온전히 이뤄내지 못한 열정적인 삶을 식히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병실로 옮긴 남편에게 큰아들이 '폐암'이라는 말을 전했다. 남편은 각오하고 있었던지 '수술은 가능한지?'를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항암은 해보잡니다'는 큰아들의 말에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자. 병원에서는 어떻게 해도 죽는다는 소리인데 집에 가서 죽자."
남편의 뜻을 꺾을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딸들과 며느리들이 '암환자에 좋은 식사요법'이라는 책을 펼쳐놓고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는 걸 지켜보다가 사랑방으로 갔다. 남편은 글을 쓰고 있었다. 무슨 글이냐는 내 물음에 '내가 살아온 걸 좀 적어놓으려고'하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건강해서 쓰는 글이 아닌, 아픈 상태에서 살아온 날들을 적는다는 것. 생각해보면 암담하고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 '적지 마세요. 그냥 쉬세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살아온 것을 붓으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벼루에 먹을 갈면서 넘겨다보니 남편의 손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고, 붓놀림은 예전과 판이하게 다른 흔들림으로 종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은 그 자서전을 끝내지 못했다.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채무 상환 독촉장 때문이었다. 이제 남편의 살날이 머지않았기에 아이들은 '더 이상 이자를 내는 일도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이자를 납입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픈 남편의 면전으로 계속 날아들었다. 시동생이 왔다.
"형님! 전답에 담보 잡힌 것 있습니까?"
"없다."
"그러면 혹시 보증 세우고 대출 받았습니까?"
"정부 지원 사업이라 보증은 없다. 왜 그러냐?"
시동생은 그러면 되었다며 남편의 모든 재산의 명의를 변경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담보도 안 잡혀 있고, 보증 선 사람도 없으면 형님 재산이 없을 경우에는 빚을 안 갚아도 손해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모든 재산을 형수님이나 제 명의로 돌려놓읍시다. 재산을 지켜야지요."
그동안 나는 남편의 사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은 남편이 알아서 하겠거니 믿었고, 내 연배에서는 '바깥에서 하는 일을 안에서 꼬치꼬치 아는 것은 아니다'는 것으로 알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을 하면 모든 재산은 정부에서 가져가게 될 거라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을 방법을 시동생이 갖고 왔다니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아주 의외였다.
"내가 빌린 돈이니까 못 갚으면 재산을 다 주는 것이 맞지. 변칙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지켜서 뭘 할 건데?"
남편의 말에 시동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 형님이 반듯하게 살아오신 것은 이해를 하는데요. 골짜기에서 20년 동안 그 지긋지긋한 담뱃진하고 투쟁하다시피해서 번 재산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보존해서 애들한테 줘야지요. 형님은 20년의 세월이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맞다. 우리 집 논밭은 모두 남편과 내가 담배와의 투쟁을 치르면서 얻은 수확물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시동생의 말대로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으로 보였다.
"숙이 아부지요. 서방님 말대로 합시더. 우리가 애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을 해서 일군 재산인데 하나도 못 물려준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들어보니까 명의이전만 해놓으면 지킬 수 있는 일인데 왜 안 합니까?"
나중에는 집에 온 큰아들에게 '니 아부지 좀 설득해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대로 가만히 지켜보세요. 설마하니 아버지가 나쁜 결정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따라 갈랍니다'며 거절을 했다.
시동생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나랏돈 떼먹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싫다'로 결론을 내 버리고 대신 다른 결정을 하였다. 진단을 받은 2개월간 남편은 항암치료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통제로 지내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동생과의 재산 보존 문제를 얘기한 직후에 남편은 항암치료를 받겠다로 변했다. 담당 선생님께 항암치료를 부탁하며 남편은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제가 살아야 하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생전에 남편과는 다른 모습이라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가슴이 쓰라렸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니 평소와 다르게 남편은 조급증에 허둥거리기도 했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2회 차까지는 조금 효능이 보여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남편이 입원한 암병 동에서는 하루에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특이하게도 새벽 시간에만 유가족의 통곡과 함께 흰 천을 덮어씌운 이동식 침대가 지하에 있는 영안실로 내려가는 거였다.
잠결에 통곡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도 저렇게 갈 것 같은 공포감에 새벽마다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항암치료는 더 이상의 효능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남편은 회진을 온 담당 선생님을 잡고 울었다.
"선생님!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볼까요?"
담당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교대로 병원에 와서 남편을 지켰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며 용기를 주었다.
"어르신! 자녀분들이 정말 예의가 몸에 배어 있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 있어보면 자식교육을 잘 시킨 집은 알 수 있거든요.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착합니까? 어르신은 자식들을 봐서라도 나으실 겁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야. 남편이 나을 수만 있다면야.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여섯 번의 항암 후 남편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져 갔다. 물도 삼키지 못할 지경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면 가슴이 쓰라렸고, 정신도 100% 온전한 상태가 유지되지 못했다.
병원 측에서는 '생명연장'을 할 것인지에 대한 동의서를 건네주었다. 큰 아들은 '하자'는 의견이었지만, 나는 '안 하겠다'는 의견을 냈다.
"저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더 살아달라고 하느냐?"
다른 자식들의 의견을 모아 '생명연장'을 포기했다. 남편의 남은 생명은 이제 일주일이 남았다.
나는 남편에게 '이제 그만 가라고. 편하게 그냥 눈을 감으라고' 말해주었다. 남편은 이승과 인사를 하기 사흘 전에 기적적으로 기력이 회복되었다.
시동생은 다시 명의 이전 이야기를 했고,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지른 빚은 갚아야지. 그래야 내 자식들이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어. 재산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욕을 얻어먹으면서 지킬 필요는 없어.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보다는 떳떳함이 더 필요해."
정말 잠시 동안의 짧은 회생이었고, 그것이 남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남편은 이튿날부터 다시 혼수상태에 들어갔고, 설날 하루 전날 저녁에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가족을 모두 오라는 전갈을 보내주셨다.
"다섯 시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담당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시간보다 1시간을 더 버틴 남편은 설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살아보고 싶어 항암제와의 힘겨운 사투를 했지만, 결론은 죽음의 시간을 더 당기고 만 거였다. 6개월의 시한부가 4개월하고 보름을 겨우 채운 때였다. 우리는 병동의 다른 사망자 유가족처럼 통곡을 하면서 남편의 이동식 침대를 따라 영안실로 내려갔다. 아침에 집 근처 병원에서 이송차를 보내주기로 했기에, 새벽 내내 영안실에서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말했다.
"아버지는 담배로 재산을 일구셨는데, 담배 때문에 돌아가시는구나"
그랬다. 담배가 화근이었다.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 직후에 담배를 끊었지만, 그때 이미 암세포가 돋아나고 있었을테니까.
남편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도에서는 농어민상을 내려주었고, 유림의 장례에 기준하여 격식에 맞춘 장례가 치러졌다. 우리 지역에서는 문상을 오는 사람에게 답례로 담배를 한두 갑 주는 풍습이 있었지만, 나는 담배를 주지 않았다. 담배를 답례로 주는 것이 '병에 걸려 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도저히 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담배는 내게 원수가 되어 버렸다.
10. 남아있는 날들의 행복
남편의 장례 후에 우려했던 일이 줄줄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채무 승계에 대한 독촉장이었다. 3억5천만원. 5억원을 대출하여 열심히 갚았지만, 원금이 3억원이 넘었다. 그런데 우리집 재산은 모두 털어도 3억원이 안 되는 형편이었다. 시골은 아무리 토지가 많아도 가격이 도시에 비해 상당히 저렴하기 때문에 3억원을 갚을 여력이 되지 못했다.
큰 아들이 한정승인으로 상속포기서를 제출했고, 이제는 집으로 오는 우편물의 발신처가 법원으로 바뀌었다.
'압류되었습니다'' '경매 들어갑니다' '이의 제기하세요' '경매 유찰입니다' '경매가 낙찰되었습니다'
논밭의 건마다 날아오는 등기서류는 3년 동안 이어졌다. 서류가 올 때마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남편의 말대로 '빚에 대한 책임은 진다'며 명의이전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었다. 만약 명의를 옮겨 재산을 보전했다면 남편의 말대로 숱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을 텐데, 역시 남편의 판단이 옳았음도 알게 되었다. 나는 예전처럼 회관에 가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고, 아들은 큰집 장손으로서의 위치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시아버님의 명의로 해놓았던 밭이 남아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시아버님의 명의로 된 밭은 다른 자식들과 공동 상속인 까닭에 남편의 지분이 많지 않아 채권자 측에서도 경매를 올리지 않아 그 밭은 계속 우리가 경작을 할 수 있었다.
"왜 아버님 명의로 해야 해요?"하며 서운했던 기억은 '내가 경작할 밭'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남편의 선견지명처럼 보였다. 대단한 남편이다.
지루했던 경매가 모두 마무리되면서 더 이상 법원의 등기우편물은 오지 않고 있다. 덕분에 그런대로 평온한 날들을 지내는 요즘. 남편의 흔적을 끌어안고 사는 엄마를 생각해주는 자식들이 수시로 오는 덕분에, 심심할 일이 별로 없는 시간을 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의 첫 밭에는 올해도 들깨를 심었다.
"여기에 들깨를 심어서 애들한테 나눠줘야지"
남편은 이 밭으로 올라오는 찻길을 닦으면서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들깨농사를 짓는다. 심고 거둘 때는 자식들과 함께 하지만, 김을 매거나 순매김을 하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다. 여든의 나이에 혼자서 그 넒은 밭의 김매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밭둑 위에 남편이 있으니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충당되고 있다.
재작년에는 대상포진을 앓는 통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임대를 내놨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 사람이 와서 '담배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통에, 밭을 내주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나는 담배를 아주 싫어한다. 들깨와 소소한 텃밭 농사 외에 내가 하는 일은 재봉이다. 젊은 시절에는 먹고 살기 위해 삯바늘로 재봉틀에 앉았지만, 지금은 내 새끼들에게 수제 옷을 입히기 위해 앉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밥상보도 만들고, 예쁜 보자기와 모시옷, 베옷을 만드는 일은 재미있다. 여름이면 모시와 베옷을 즐겨 입었던 남편을 추억하는 일도 재봉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성복을 사 입기에 내가 만드는 베옷이나 모시저고리는 '직접 만든 옷'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식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한 벌씩 완성이 될 때마다 '이 옷을 입고 기뻐할 자식의 표정'을 생각하면, 그나마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실감하는 것이다.
어제는 주말이라고 들어온 자식들을 데리고 들깨를 심었다. 모레쯤 비가 온다고 하니 올해도 들깨는 대풍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남편이 닦아놓은 길을 걸어보았다. 자식을 위해 길을 닦은 사람. 자식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반칙을 하지 않았던 사람. 길은 남편이 보여준 반듯함 만큼이나 자식들의 손길을 거쳐 잘 손질되어 있다. 내년에도 이 길을 따라 남편에게도 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나는 들깨 풍년을 예약해 줄 단비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들깨를 좋아한다. 오메가3가 듬뿍 들어있다는 들깨는 담배를 이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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