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언어운사' 정치인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나는 아나운서다. 내 직업인 아나운서는 '언어운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언어를 아름답게 운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수습 아나운서로 선배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던 시절 '언어운사'는 내 직업적 자부심인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선 안 된다" "늘 품위와 배려가 묻어나는 말을 하라" "5천만 명의 국민 중 한 사람에게라도 상처가 되는 말은 방송에서 내뱉지 마라"… 선배들의 잔소리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리고 이 엄격한 가르침을 이제 나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강제하고 있다.

이런 나의 직업적 시각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동네가 있다. 바로 '정치' 세계다. 좋은 말을 써야 하는 아나운서와 달리, 정치인들은 자극적이고 거친 언어를 쏟아낸다. 마치 누가 더 선정적인 말을 하느냐를 경쟁하듯 충격적인 표현들이 범람하고 있다.

내년 미국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도널드 트럼프는 한 유세 현장에서 "사우디와 한국은 미쳤다"는 말을 했다. 또 "멕시코인들은 성폭행범이자 마약을 가져오는 범죄를 일으키는 주범이다"라는 막말도 퍼부었다. 연이은 폭탄발언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지지율은 이후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실제 3%였던 지지율은 두 달 만에 18%까지 올랐다. 공화당 후보 중 1위를 기록했고 고공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 언론들은 "트럼프가 오바마의 햇볕에 숨어 있던 강한 미국의 향수를 가진 골수 공화당원들을 공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막말과 편 가르기 정치로 집토끼만큼은 확실히 결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이라고 다르지 않다.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김무성 대표는 저 멀리 미국에서도 연일 이슈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한민국이 좌파들의 주장대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거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우리의 국부로 봐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들을 내뱉고 한국전 참전 용사들에게 큰절을 남발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 대표는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런 언행을 보였을까? 결국 보수 진영의 표심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임을 강조해 전통 지지층의 마음을 얻겠다는 속내로 보인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도 느껴진다. 내년 총선, 후년 대선이라는 정치권의 가장 큰 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집토끼'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산토끼'를 잡으러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집토끼를 잡을 때와 산토끼를 잡을 때의 언어는 180도 다르다. 전통 지지 기반에 호소할 땐 선명하고 날카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반면, 부동층을 어르고 달랠 때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따뜻하게 포용하는 언행으로 다가간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례가 그렇다. 당선 직후 박 대통령은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취임을 앞두고 보다 많은 국민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집권 반환점을 도는 지금 대통령의 언어는 '배신의 정치'와 '국민의 심판'이라는 매서운 표현으로 바뀌고 있다. 30% 콘크리트 지지층만을 보고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 것 같다.

정치인의 언어가 늘 아름답고 따뜻할 수만은 없다. 특히 전쟁 같은 선거를 앞두고는 더 독하고 튀는 언사를 쏟아내는 전략을 펴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쉽다. 보다 배려하고 포용하는 세련된 정치언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국민들이 눈살 찌푸리지 않고 정치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어운사'의 별명을 정치인에게도 붙여줄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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