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전화에 속도를 줄인다. 오늘은 어떤 차림으로 왔을까. 그녀는 가끔 생뚱맞은 복장으로 나타난다. 언젠가 하루는 챙이 있는 모자에 반바지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나타났었다. 옷은 가벼운데 신발이 무거웠다. 언밸런스다. 유행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만들어 가나보다 생각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캠퍼스를 활보하는 생기발랄한 20대가 아닌 하늘의 명을 따를 지천명의 나이다. 점잖게 입고 다녀야 할 나이에 무슨, 하면서도 다시 보니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친다. 립펜으로 선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다. 선 안에서의 붓은 자유롭다. 붓이 지나간 입술은 요염하다. 스카프 하나를 매더라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매고, 모자를 쓸 때도 젊은이들이 쓰는 챙이 있는 모자로 그 나이에는 쉽게 내지 못하는 멋을 낼 줄 안다. 겉멋이 있는 여자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그녀의 근무지에 갔다가 무엇인가를 물었었다. 그때 그녀는 "내가 가르쳐주면 당신은 내게 무얼 가르쳐 주겠느냐?"라며 정색을 해서 나를 당황케 했다. 자기가 가르쳐 주면 상대방인 나도 그녀에게 가르쳐 줘야 공평하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란다.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쁨이 있지 않느냐고 하니 아니란다. 거래를 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아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고 있다. 흔히들 그 사람을 보면 그 친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녀와 나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유유상종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지금껏 그녀 옆에 내가, 내 옆에 그녀가 있다. 동료들마저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누구보다 단짝처럼 잘 붙어 지낸다고 입을 모은다.
그녀는 비싼 옷을 싼 옷처럼 입는 나와 달리 싼 옷을 비싸게 입을 줄 안다. 부탁하면 거절을 하지 못해 들어주는 나와는 달리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매몰차게 거절할 줄 안다. 상황에 따라서 공짜로 도와주기도 하지만 수고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기를 원하고, 도움을 받았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여자다. 그런 그녀를 주위에서는 깍쟁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아는 그녀는 한없이 헤픈 여자다. 눈물이 헤프고 정이 헤프다. 드라마를 보고 훌쩍거리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금방 눈시울이 빨개지는 여자다. 채소 파는 할머니와 말동무하다가 필요치도 않은 부추와 깻잎, 호박을 사서 이웃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집에 있는 먹거리를 가져와 정자나무 아래서 노는 할머니들에게 나눠주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하면서도 자기관리는 철저하고 지저분함을 참지 못하는 깔끔한 성격의 여자다. 나는 그런 여자를 감히 속멋이 있는 여자라고 한다.
그런 여자와 매주 수요일마다 박물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도동서원에서 근무를 마치고 수성구에 있는 수박물관까지 가자면 마음이 바쁘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자리를 맡아 놨으니 운전 조심하고 천천히 와" 하며 따뜻한 마음을 건넨다. 그녀의 전화 한 통에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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