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짧은 메시지

안 건 우
안 건 우

오랜 친구가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던지라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도 어떤 기분인지 알 정도의 오랜 친구입니다. 오랜 친구지만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살아가는 목표나, 가치가 다르고 서로 이해를 못 해 이견이 있을 땐 주먹다짐은 아니지만, 가차없이 서로에게 말로 상처준 적도 많았습니다.

다시는 안 본다 생각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연락을 합니다. 그리고 꼭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전화 안 했냐?" 그 말 한마디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또 만나서 낄낄대면서 소주잔을 기울이게 됩니다. 만나면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시시껄렁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얼근하게 취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삽니다. 얼마 전 그 친구와 만났습니다.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던 무렵, 날씨는 너무 더웠고, 여러 가지 속상한 게 많은 날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정말 위로를 받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전화기를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시원한 맥줏집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특별한 이야기 없이 맥주만 마셨습니다.

친구는 눈치로 내가 힘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어쭙잖게 위로하려 했다간 벌처럼 쏠 것을 아는 친구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친구의 농담에 피식 웃음을 보이자 친구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저를 위로를 해주려 의자를 고쳐 앉았습니다. 속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겪게 되는 나름의 스트레스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마치 토하듯 쏟아부었습니다. 친구는 말없이 들어주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 저는 그 한마디에 흐리멍덩했던 눈빛에 초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친구는 이어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넌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네가 부럽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잖아. 그러니까 엄살떨지 말고 더 열심히 해라. 네가 술 먹고 싶어 별짓을 다하는구나?"라고 웃으며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취기가 올라서였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친구가 부럽다고 말을 해주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저인데 견딜 만한 좌절에 약한 모습을 보인 제가 그날따라 너무 작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친구의 존재에 감사했습니다. 혹시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까 싶어 일찍 취한 척했습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깡통 맥주 두어 개를 사서 돌아와 친구에게 술자리에서 부끄러워하지 못했던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꾹꾹 눌러 써내려가다, 결국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 잘 왔다. 더운데 욕봐라' 이렇게 보내고 기분 좋게 잠을 청했습니다. 아마 친구는 저의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고, 많은 이야기와 저의 감사와 고마움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르면 할 수 없는 거고요.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