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천의 문중이야기] <12>영일 정씨-한국사 빛낸 정완영·정승화

김천을 사랑한 민족주의 시인 정완영…6·25 최일선에 뼛속까지 장군 정승화

현대시조의 대가 정완영의 문화적 배경과 창작공간이 마련된 백수문학관.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현대시조의 대가 정완영의 문화적 배경과 창작공간이 마련된 백수문학관.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영일정씨 문중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김천 봉계마을 입구에는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 했던 정승화 장군 추모비가 서 있다. 추모비 뒤쪽에는 백수 정완영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사진은 정승화 장군.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영일정씨 문중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김천 봉계마을 입구에는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 했던 정승화 장군 추모비가 서 있다. 추모비 뒤쪽에는 백수 정완영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사진은 정승화 장군.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영일 정씨(迎日鄭氏)에는 대한민국 근대사에 문(文)과 무(武)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있다. 시조시인인 백수 정완영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도 군인의 본분을 지켰던 육군 대장 정승화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의 치열했던 삶을 따라가 보자.

◆고향과 나라를 사랑한 현대시조의 대가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중략)/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조국, 정완영)

국어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 읽어 봤을 시조 '조국'(祖國)을 지은 시조시인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97)은 1919년 영일 정씨 입향조 정이교(鄭以僑'1449~1498)의 15세손 정지용(鄭智鎔)과 연안 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근대적인 교육환경이 갖춰지기 전 영일 정씨 문중은 봉암(鳳巖)서당이란 문중서당을 열고 후손들을 교육했다. 정완영의 아버지 정지용은 초대 김천 유도회(儒道會) 회장과 섬계 서원장을 지냈다. 이런 가풍 속에 정완영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주학을 배웠다.

정완영은 봉계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던 1927년, 가족이 일본과 한국으로 흩어지는 등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해 마을에 큰 홍수가 났고 정완영의 아버지 정지용의 논이 물에 떠내려가면서 가족 전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농사에 실패한 정지용은 먹고살기 위해 아들 정완영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다. 당시 정완영의 할아버지와 어머니, 형 등은 봉계에 남았다.

정완영은 아버지와 함께 일본 곳곳을 유랑했으나 객지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정지용은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다시 김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지용은 아들 정완영을 일본 오사카 천왕사 야간 부기학교에 입학시켜 2년간 공부를 시켰다. 이후 정완영은 1937년 고향 김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봉계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복학한 정완영은 이선흥, 홍성린 교사로부터 우리의 전통 가락과 시조에 대해 배웠다.

시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정완영은 시조작가 조운(曺雲)을 동경했다. 조운은 1920년대 중반부터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했던 시조작가로, 최남선 이후 이병기와 함께 시조부흥운동의 후반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조운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문학세계를 동경했던 정완영은 조운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인 이상과 연결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시조 창작에 전념하던 정완영은 1946년 김천에서 시문학 구락부를 발족한 후 이듬해 동인지 '오동'을 출간했다. 이후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가 당선되고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이 당선되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정완영은 지금까지 3천여 편의 시조를 창작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시조 '조국'은 1974년 국정교과서에 수록됐고,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 등의 작품이 초'중 교과서에 수록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완영은 저서 '차(茶) 한잔의 갈증'에서 시조 '조국'에 대해 "섬겨야 할 조국이 없는 날에 급기야는 광복의 날은 돌아왔건만 사람마다의 가슴에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여순(麗順)사건이 일어나고, 대구 10'1사건, 6'25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암울한 생각을 울며 읊조렸던 것이 후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나의 작품 '조국'"이라고 밝혔다. '조국'은 시대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고 조국의 비극적 현실을 깊이 슬퍼한 정완영의 조국애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정완영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그의 호 '백수'(白水)는 고향 김천(金泉)의 샘 천(泉) 자를 파자해 '백' 자와 '수' 자로 나눈 것이다. 이외에도 정완영은 고향 김천을 둘러싼 황악산과 자신을 연결하기도 했다. 평소 정완영은 주변 지인들에게 "황악산의 높이가 1,111m인데 내 생일도 11월 11일"이라며 고향 사랑을 보였다.

정완영은 1974년 제11회 한국문학상을 받았으며 1989년 제5회 육당문학상, 1995년 은관문화훈장, 1999년 제2회 만해시문학상, 2004년 제1회 육사 문학상, 2007년 제5회 유심특별상, 2008년 제13회 현대불교 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더불어 1992년 한국시조시인협회장, 2003년 한국문인협회 고문, 2005년 경상북도를 빛낸 100인 선정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질곡의 시대, 군인의 본분을 지킨 정승화

"나는 어제도 군인이었고 오늘도 내일도 군인일 따름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군인의 길을 갈 것이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힘이지, 이 힘을 이용해 나라의 권력과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육군 대장(참모총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등 질곡을 겪으면서도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했던 벽송(碧松) 정승화(鄭昇和'1929~2002)의 말이다.

영일 정씨 문중 입향조 정이교의 16세손 정승화는 영일 정씨 교리공파가 대대로 사는 봉계에서 태어났다. 봉계는 북쪽에 난함산과 동쪽 문암봉, 서쪽 극락산이 자리하고 마을 앞으로는 넓은 옥토가 펼쳐진 명당이다. 영일정씨 문중은 이곳 지형을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이라 부른다. 지형상 많은 장군이 배출됐고 정승화도 이런 기운을 이어받았다는 것.

정승화는 외가인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서 태어났다. 첫돌이 지나서야 본가가 있던 봉계로 돌아온 것은 종손의 명이 오래가길 원했던 문중 어른들의 뜻이었다. 정승화는 어릴 적 팔만(八萬)이라고 불렸다. 이 이름도 종손의 명이 길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지어졌다.

이런 집안 어른들의 정성 덕분일까. 정승화는 6'25전쟁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했으나 단 한 차례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정승화의 어릴 적 꿈은 시골 면장이었다. 그는 낙후된 농민을 계몽해 농촌발전에 보탬이 되려는 꿈을 가졌고 이를 실천하고자 시골 면장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정승화의 삶은 그의 희망과 달랐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을 지켜본 그는 민주주의가 굳건히 세워지려면 공권력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골 면장의 꿈을 접고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1947년 조선경비대(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사관학교 제5기에 지원한 정승화는 1948년 졸업과 동시에 임관해 1979년 12'12사태까지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정승화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전쟁에서 15차례 전투에 참가했다. 전쟁 초반 북한군에 밀리던 한국군은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과 경주 안강에서 시작된 형산강 도하작전을 시작으로 38선 진격전을 벌인다.

당시 백골부대로 불리던 제18연대 3대대장을 맡고 있던 정승화는 9월 29일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한다. 이후 후속 부대가 10월 1일 38선을 완전히 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정승화는 6'25전쟁 초기 청량리 부근 전투를 시작으로 용인지구 전투, 유천리 부근 전투, 현리지구 철수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최일선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차례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니 전투복 가랑이에 총알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정승화는 이처럼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 "언제나 적을 이기겠다는 강한 신념과 내 목숨은 항상 조상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강한 정신에서 나왔다"고 술회했다.

정승화는 1961년 준장으로 승진하고 5'16쿠데타 이후 방첩부대장(현 기무사령관)이 된다. 이후 1967년 육군 소장에 승진했고, 1968년 육군종합행정학교 학교장, 1973년 육군 제3군단 군단장, 1975년 제24대 육군사관학교 학교장, 1977년 육군 제1군사령관을 거쳐 1978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한다. 육군 대장 승진 후 1979년 2월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으나 12'12사태를 겪으며 같은 해 12월 육군 대장에서 강제 예편돼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겪었다.

1981년 사면 복권됐으나 그의 군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군적을 회복하고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한다.

2002년 지병으로 세상을 뜬 정승화는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됐다. 정승화는 그의 자서전에서 후배 군인들에게 "군인은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직업"이라며 "이런 봉사 정신을 늘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백수문학관

백수문학관은 현대시조의 선구자로 시조의 중흥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백수 정완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됐다. 2008년 개관한 백수문학관은 살아 있는 작가의 문학관이란 흔치 않은 사례로 김천시 대항면 직지문화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23억원을 들여 3천587㎡ 대지에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건립됐으며 전시실과 세미나실, 자료실, 사무실, 집필실을 갖춰 정완영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백수문학관에는 정완영의 연보를 비롯해 창작시집, 문학적 배경, 여러 문인과 교류했던 서신, 실제 창작공간, 대표 작품, 탁본 등이 전시돼 있다.

김천 신현일 기자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정승화 자서전)

차(茶) 한잔의 갈증(정완영'햇빛출판사)

정금기 영일정씨 교리공파 대종회장

정창화 영일정씨 교리공파 사무총장

정환민 영일정씨 교리공파 13세손

정영갑 영일정씨 교리공파 16세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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