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절의 TV 뉴스를 '땡 전'이라 했다. '땡' 하는 정각 시간을 알린 뒤에 언제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이라고 뉴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독재 정권의 나팔수였다.
전두환 5공의 캄캄한 터널 속에서도 한 줄기 빛 같은 참 언론인이 계셨다. 몽향 최석채(1917~1991) 선생이시다. 몽향은 일제강점기부터 언론에 몸담았다. 1950년대에 자유당 정권을 비판한 사설로 대낮에 테러를 당하고 옥고도 치렀다. 1960년대 초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주필로 꼿꼿한 자세로 5'16 군사정권에 맞섰다. 당시 조선일보는 권력에 날을 세웠다.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회장을 거쳐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매일신문사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몽향칼럼'을 연재했다. 몽향의 글 힘은 그 당시 모든 언론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매일신문을 보며 큰 즐거움을 느낄 때는 몽향 칼럼을 읽을 때였다.
어느 날 몽향 칼럼이 팽팽하던 풍선에서 바람이 휙 빠지듯 글 힘이 쑥 빠졌다. 곧이어 한 칼럼에서 스스로 그 이유를 밝혔다. 얼마 전 20대 후반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 아픔은 자신이 겪은 어떤 고통보다 심했다고 했다. 조금 지난 후 몽향의 칼럼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평생 독재 권력에 꼿꼿이 저항하던 언론인이 자식의 죽음에 그만 풀이 꺾였고 시름시름 앓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몽향이 자식을 잃은 그즈음 이한열은 직격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이한열 어머니는 평소에 대학생 한열에게 데모를 하되 앞장서지는 말라고 했다. 얼마 전 이한열 기념관에 갔다가 어머니가 쓴 메모에 그만 가슴이 울컥했다. "장하다. 미운 오리 새끼, 이럴 수가 있느냐. 이한열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엄마가." 그 죽음이 아무리 장하다 해도, 다 큰 자식을 잃은 엄마는 아직도 절규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7분에 "아빠", 59분에 "아빠 사랑해", 9시 정각에 "사랑해요"라고 '사랑하는 막내아들'은 아빠에게 카카오톡 문자를 숨 가쁘게 보냈다.
아빠는 9시 7분에 비로소 쑥스럽게 답한다. "웬∼사랑 고백! 아빠도 사랑한다. 날씨가 꿀꿀…신나게 놀다 와라. 도착하면 엄마한테 문자 주고", 26분에 "아들", 34분에 "전화 주라", 10시 3분에 "사랑한다, 아들아 제발…무사히 살아만 있어다오".
아들은 초조한 아버지에게 끝내 답을 주지 않고 한참 뒤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세월호 유족들은 선장이 팬티 바람으로 구조되고 아이들은 선실에 갇힌 이유를 밝혀달라고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진실 밝히기를 거부하는 정부와 나팔수 언론의 말만 듣는 일부 국민들은 유족들이 보상금 때문에 억지를 쓴다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자식 잃은 슬픔을 헤아리지 않는 몰상식한 마음이야말로 손가락질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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