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9>금오산이 낳은 인물 초인 박정희(상)

"하면 된다" 생사 건 국가혁신…그에게 내일은 없는 듯 했다

구미 금오산이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 중의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추모관
구미 금오산이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 중의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추모관
박 전 대통령 구미 생가
박 전 대통령 구미 생가
공부방
공부방
사랑채
사랑채

매일신문은 2014년도에 이어 올해도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기획 시리즈를 이어간다. 8월 12일부터 8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 본지에 게재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사육신 하위지, 독립운동가 박희광, 명창 박록주, 영화인 김유영 등 금오산이 낳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금오산의 생태와 금오지 등 금오산이 간직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구미 금오산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인문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구미)에 있다'고 했을 만큼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금오산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민족과 겨레를 인도하는 횃불이 되었다.

-편집자 주(註)-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태어나 가장 괴롭고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조국을 가난과 배고픔, 무기력에서 구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선진대국의 길로 진입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1인당 GNP 78달러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전쟁과 폐허, 가난과 절망의 질곡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국민들의 맨 앞에 서서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을 다진 인물이 박정희다.

◆가난한 양반가에서 출생

박정희가 태어난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는 80여 채 집들이 여러 모둠으로 나뉘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면 소재지에서 8㎞ 정도 떨어진 궁벽한 마을로 원래 이름은 '모래실'이다. 박정희의 집은 금오산 자락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성격이 호방하고 체격도 좋았다. 고령 박씨 직강공파로 신라 경명왕의 후손이자 조선 영조 때 문신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잘못된 제도와 탐관오리를 단죄하는 데 앞장섰던 암행어사 박문수의 후손이다.

박성빈 자신도 조선 말에 효력부위를 지낸 무장이었으나 조선 말기 탐관오리의 횡포와 백성들의 고난을 보고 동학운동에 가담하면서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는 설상가상으로 집안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고향 성주를 떠나 처가 쪽과 인연이 있는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 왔다. 처가 쪽 선산(先山)을 돌보고 몇 뙈기밭을 얻어 경작하는 처지라 살림은 호구책으로도 모자랐다.

◆늘 죽음과 함께 한 사람

어머니 백남의가 박정희를 잉태했을 때 나이는 45세였다. 해산 예정일은 시집 보낸 딸의 출산일과 비슷했다. 식구들이 끼니를 잇기도 힘든 가정형편에 '다 늙어서' 또 아이를 가졌다는 부끄러움에 백남의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

수양버들 뿌리를 달여서 마시기도 했고, 애 떨어지는 데 용하다는 진간장을 한 사발씩 마시는 바람에 쇼크로 쓰러지기도 했다. 높은 데 올라가 뛰어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뒤로 나자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노력을 했지만 뱃속의 아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산모는 몸을 다쳐 드러눕기도 했지만 뱃속의 아기는 한 며칠 조용한 듯하다가도 발길질을 해댔다. 질긴 목숨, 세상에 꼭 나와야 할 운명이었다.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는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때문인지 박정희는 남다른 사생관(死生觀)을 가졌다.

부패한 정치를 혁파하고 가난과 절망에 빠진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5'16군사 쿠데타를 감행했을 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해병대 병력이 청와대와 방송국을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한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으로 이동시키던 중 쿠데타 정보를 접한 참모총장 장도영이 출동시킨 헌병대와 한강 다리 위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교전에서 해병 6명, 헌병 3명이 부상했다. 막상 교전이 벌어지고 2시간가량 대치상태가 이어지자 쿠데타군 내부에 동요가 발생했다. 그때 박정희 장군이 지프에서 내려 한강 다리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강 다리 위를 걷는 그의 귓전으로 총알이 핑핑 날아다녔지만 그는 상체를 굽히거나 은폐물에 기대지도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다. 박정희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한강 다리 위에서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예상치 못했던 진압군의 저항, 길어지는 교전에 흔들렸던 쿠데타 세력들은 다시 용기와 확신을 얻었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한강을 돌파했다.

◆이순신을 존경한 박정희

박정희는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이순신 장군의 말 즉,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1949년 군 내 남로당 조직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등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탄이 육영수 여사를 쏘았다. 여사가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간 뒤에도 박 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했다.

"여러분,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연설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당황하거나 겁먹은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에 맞은 뒤에도 "난 괜찮아"라고 말하며,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난 괜찮아'라는 말에서 '나는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조국건설 생명을 걸다

박정희는 이처럼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건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삶과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국 근대화 정책 역시 일상이 아니라 혁명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샐러리맨이 아니라 전장의 전사처럼 펼쳐졌다. 그에게는 마치 내일이 없는 듯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립, 울산공업단지 건설, 새마을운동 전개 등 이 모든 경제혁명 사업을 그는 전쟁처럼 치렀다. 직접 '새마을 노래'를 만들어 잠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깨웠고, 양당 의원들의 무지막지한 반대를 견디며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큰 사업으로 총공사비가 당시 국가 예산의 23.6%에 이르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하면 나라 망한다'며 대표적인 야당 의원이 드러누워 시위를 했지만 박정희는 밀어붙였다.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충고를 뒤로 밀쳐두고 당시 ㎞당 1억원이라는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유례없이 싼 비용으로 완공했다. 그 결과 기차로 서울~부산 간 15시간 걸리던 교통 시간이 자동차로 4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물류비용이 줄어들자 경부고속도를 따라 화물차가 밤낮없이 달렸고, 대한민국 경제는 폭발적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도무지 적합하지 않다는 중화학 공업, 우리도 제철공장을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고집에 외국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비웃음을 던질 때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생사를 넘나드는 듯 전투적인 대한민국 혁신사업은 농업국가였던 대한민국을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동차, 조선, 제철산업, 반도체, 전자산업 국가로 키우는 초석이 되었다. 더불어 20세기 초반까지 '은둔의 국가'였으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고, 6'25전쟁 직후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나라를 GDP 3만달러, 세계에서 14번째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로 키우는 주춧돌이 되었다.

◆박정희 독재의 공과(功過)

생명을 걸고 조국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독재를 단행했다. 그 결과 그의 많은 공(功)은 묻히고 과(過)만 부각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유신시절 재야의 중심인물이었던 백기완 선생은 "박정희는 운동권을 못살게 했지만, 민주화를 부르짖는 정치꾼들은 국민을 못살게 했다"고 말한 바 있다.

1970년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지하 시인은 "요즘은 오적보다 무서운 오십적, 오백적이 설친다. 박정희는 적어도 자기를 위해 독재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위해 독재를 했다. 그에 반해 (민주주의 대명사로 알려진 전직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자기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정치를 했다. 그 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실록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의 저자 고산 고정일 선생은 "박정희는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을 후원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지만, 돈 그 자체에 대해 한결같이 청빈했다. 한여름에도 에어컨 대신 부채를 썼고, 물을 아끼려고 청와대 화장실 양변기 물통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었다. 박정희의 경제구상이 없었더라면 삼성, 현대, LG와 같은 세계적 기업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