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웃으로부터 오디를 한 보따리나 받게 되어 밤마다 오디를 갈아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오디를 갈아 마시다 보면 치아며 입술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거무튀튀해지는데, 나도 모르게 보라색 입술로 나섰다 낭패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디를 입안 가득 넣으면 자연스레 어린 시절 여름의 기억이 통째로 덮친다. 더운 날 그 오디를 따먹으며 나는 대체 언제 어른이 되나 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구서 '고디'가 뭔지도 모르고 자라 시골로 이사를 가서는 부러 놓은 밭두렁 들불을 "불이야" 소리치며 양동이 한가득 물을 채워 낑낑대며 끄다 어르신께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하교종이 울림과 동시에 오늘 먹은 빈 우유곽을 하나씩 손에 들고, 좁게 난 학교 뒷문을 통해 냇가로 냅다 뛴다. 한편에 직사각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바짓단을 걷어 올려 고디 줍기에 한창이다. 그렇게 우유곽을 가득 채워서 가면 삶아서 다슬기 속을 쏙쏙 빼먹었다. 또 학교 담벼락 따라 서 있는 키 큰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먹고는 손도 입술도 치아도 보라색을 만들어서 서로 놀려댔다. 누가 논두렁에서 개구리를 잡으면 모두들 그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개구리를 튀기거나 삶아 나눠 먹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루치 제 먹을 간식을 준비하며 놀았다. 과자를 사먹자니 다리를 건너 읍내에 가야 했는데 자전거 없이는 엄두가 안 났고, 무엇보다 산딸기니 오디니 개구리가 지천이었다. 간혹 오란다나 꾀돌이가 먹고 싶을 땐 동네 아이들이 마귀할머니라고 별명을 붙인 뒷집에 가면 마루에 그런 것 몇 종류를 부려놓아 오십원, 백원에 살 수 있었다. 또, 대부분 농사를 지었으므로 이웃이 종종 삶은 감자, 고구마 등 수확물을 가지고 들렀다 가면 그런 음식들은 자주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러고도 하루는 길고도 길어 마을에서 숨바꼭질부터 땅따먹기 등 온갖 놀이란 놀이를 다 했지만 시간은 왜 그렇게도 길게만 느껴졌는지.
그리도 안 가던 시간은 꼭 뜨거운 여름이 한풀 꺾이고 나면 그제야 밭두렁에 놓은 들불처럼 가속을 받아 번져나간다. 어쩌면 그 여름들, 그 뜨거운 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아, 여름이 다 지나갔구나' 하고, 다시 이 여름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훌쩍 어른이 된다.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가장 뜨거웠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짧은 가을과 추위에 다시 떨어야 하는 겨울이 온다. 오디가 끌고 왔던 그곳에서의 풍광과 사람들은, 내년엔 다시 올해의 이 더웠던 여름으로 바뀌어 있을 듯하다.
입추와 말복을 지나며 여름이 한풀 꺾이고 있다. 또 한 번의 힘겨움과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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