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설] 법원은 무죄로 판결했지만 국민 생각은 다르다

17년 전 여대생 정은희 양을 성폭행하고 사실상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스리랑카인 피의자에 대해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성폭행 가능성은 인정되나 공소시효가 지났고, 강도 행위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로써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처럼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역시 피해자는 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정 양의 죽음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정 양은 지난 1998년 성폭행을 당한 뒤 구마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도망치다 트럭에 치여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이를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초동수사가 제대로 됐을 리 없고 범인을 잡을 기회도 놓쳤다.

그나마 피의자 A씨를 법정에까지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유족들의 집념이 작용했다. 사고 현장에서 정 양의 속옷을 발견하고 성폭행에서 시작된 사건이라는 점을 처음 주장한 이는 정 양의 아버지였다. 정 양 죽음의 억울함을 알려 검찰이 재수사에 나서게 한 것 역시 아버지였다. 검찰이 정 양의 속옷에서 나온 DNA와 A씨의 DNA가 일치하는 사실을 확인, A씨를 붙잡은 2013년은 이미 특수강간에 따른 공소시효 10년을 훌쩍 넘긴 뒤였다. 결국 검찰은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혐의로 A씨를 기소했는데 법원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정 양 사건은 살인사건이나 다름없다. 성폭행이 없었더라면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 처음 이를 단순교통사고로 처리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사건을 통해 경찰은 스스로 존재 의미를 잃었다. 지금도 어떤 사건들이 교통사고로 위장돼 처리될지 의구심도 든다. 숨진 정 양의 속옷이 사고 현장 주변에 버려져 있었고 그 속옷에서 A씨의 정액이 검출될 까닭이 없다.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국민 생각은 다르다. 범죄가 있으면 단죄가 따라야 한다. 그것이 법의 존재 이유다. 정 양의 억울한 죽음과 단죄에 실패하는 데는 우리나라 사법체계의 모순이 집약돼 있다. 이러니 우리나라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OECD 최하위권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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