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10>금오산이 낳은 인물 초인 박정희(중)

소년 박정희가 구미 상모동 집에서 학교에 가기 위해 걸어갔던 기찻길 옆 구간에 조성된 박정희 조형물.
소년 박정희가 구미 상모동 집에서 학교에 가기 위해 걸어갔던 기찻길 옆 구간에 조성된 박정희 조형물.

아홉 살 되던 해인 1926년 박정희는 구미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네 살 때부터 다녔던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을 끝낸 뒤였다. 보통학교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서당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학교 건물과 수많은 학생들, 머리를 짧게 깎은 교사들의 모습, 줄을 맞춰 걷는 절도 있는 행진은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곳과 다른 세상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공부, 그것은 곧 현재가 아니라 미래였다. 박정희에게 학교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8㎞ 걸어 등교

상모리 마을에서 학교가 있는 읍내까지는 8㎞가 넘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싼 다음 정희를 깨웠다. 당시 상모리에는 시계가 있는 집이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 창살을 보고 일어나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싼 다음 아들을 깨웠다.

몹시 추운 날에는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담아 방에 들고 들어가서 아들을 세수시켰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 공부를 시킨다는 자부심과 함께 어린 아들이 먼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동구 밖까지 아들을 배웅 나온 어머니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모퉁이를 돌아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곤 했다.

◆기찻길 따라 걸으며 꿈 키워

1905년 개통된 경부철도는 1911년 압록강 철교를 준공하면서 멀리 남만(南滿)철도와 이어져 만주까지 뻗어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소년 정희는 철길을 따라 학교로 향했다. 철길이 학교가 있는 구미읍내를 거쳐 북쪽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차는 언제나 정해진 시각에 우렁찬 기적 소리를 토하며 북쪽으로, 또 남쪽으로 달렸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르는 기차를 보면서 박정희는 지칠 줄 모르는 황소의 기운을 보았다. 아직 어렸던 박정희는 그 속에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과 치열한 무역 전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박정희는 경부선을 오르내리는 기차를 보면서 등교시간을 가늠했다. 언제 어디서 기차를 만났는지에 따라 조금 늦었는지, 조금 이른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기찻길을 따라 시간에 맞춰 걷기만 하면 지각할 염려도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기차가 다니는 길 옆으로 늑대나 여우 같은 짐승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늑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기찻길을 따라 걷는 한 그런 위험은 없었다.

기찻길 옆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정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저 기찻길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군인과 무기를 실어 나른다.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더 멀리 길을 내고, 길은 다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른다.'

소년 정희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저 기찻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길을 내고, 길이 사람을 실어 나른다.'

그가 학교와 집을 오가며 걷는 오솔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여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먼저 걷고, 그 뒤를 따라 또 많은 사람이 걷고, 그리하여 마침내 길이 생겼다. 지금 내가 편히 이 길을 걷는 것은 누군가 풀과 자갈로 덮여 있던 거친 들판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주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에 길을 내고, 뒤에 올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고,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가 멀찍이서 기적을 울리며 달려왔다. 아직 학교에 닿으려면 멀었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탓에 걸음이 늦어졌던 것이다. 책보를 맨 박정희는 철길을 따라 내달렸다. 박정희는 '학교에 지각할 것 같아 8㎞를 쉬지 않고 뛰어간 적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당대의 인기 위해 일하지 않아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닦겠다고 했을 때,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겠다고 했을 때, 포항제철을 건설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닦는 것, 힘에 부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때 박정희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길이 없는 곳, 환삼덩굴과 새삼, 바랭이가 지천으로 퍼져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 때때로 늑대가 출몰하는 숲에 길을 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환삼덩굴에 걸려 피부에 생채기가 나고, 바랭이에 걸려 넘어지느라 갈 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렵지만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다.

박정희는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누구나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 훗날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착오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습니다." -박정희 회고록 중에서-

소년 박정희가 상모리 집에서 구미읍 학교까지는 어린 소년이 걸어다니기에는 힘겨운 길이었다. 뒷날 박정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름과 겨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가방을 허리에 동여매고 삿갓을 쓰고 간다. 아랫도리 바지는 둥둥 걷어 올려야 했다. 학교에 가면 책보의 책이 거의 비에 젖어 있다. 겨울에는 솜바지 저고리에 솜버선을 신고 두루마리를 입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눈만 빠끔하게 내놓고 간다. 땅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앞을 볼 수가 없다. 시골 논두렁길은 눈이 많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길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기도 한다.'

박정희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동네 어귀까지 형들과 함께 나와 기다렸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을 발견하면 "정희 오느냐" "정희야" 하고 불렀다. 그러면 박정희는 "여기 가요" 하면서 달려갔다. 어머니는 "왜 좀 일찍 오지 이렇게 늦느냐"며 자신의 목도리를 정희에게 둘러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뛰어오느라 땀이 날 정도였는데 어머니가 자꾸 목에다 둘러 주시는 것이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린 자식을 맞아 집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이불 밑에 넣어두었던 따뜻한 밥그릇을 꺼내 밥상을 차리고, 소년 박정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상머리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아들의 버선을 빨아 구들목 이불 아래 넣어 말렸다. 다음 날 아침 또 신고 가야 할 버선이었다.

◆눈물이 많았던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는 가난했고, 어렵게 공부했다. 또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 초인과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면서도 그가 눈물을 자주 흘렸던 것, 소박한 한국인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이유, 국민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은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덕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고, 1971년 국민의무교육을 실시했다. 지금은 교육열이 너무 높아 문제라고들 하지만 당시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초 경남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여공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 여공은 떨리는 목소리로 "공장장님이 가끔 영어를 쓰시는데 저는 알아듣지 못해 부끄럽기도 하고, 일에 지장이 많아요. 전 못 배운 게 한이에요"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은 옆에 있던 김한수 사장에게 "야간학교라도 만들어주면 어떻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학교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공장 직원들이 배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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