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동 반도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다. 12월 16일에는 미얀마(버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했다.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함께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소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인도군을 압박했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떠났지만 12월 10일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1942년 1월 말 일본군 2개 사단은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항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 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전세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미국 해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10월에는 남태평양 해전에서 크게 패했다.
1943년 4월 18일에는 솔로몬 제도의 전선 기지를 시찰 중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비행기 안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을 사전에 탐지한 미군은 16대의 전투기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한 것이다.
이때 야마모토 사령장관을 호위했던 비행사 중 한 사람, 다케야마 대위가 있었다. 그는 선산 북산동 최씨 집안의 수재로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항공대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비행 사관이었지만 미국 비행기의 기습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사령장관을 잃게 되자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4lm나 되는 북산동까지 가서 그의 묘를 참배했다.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가미 시바이(그림, 종이, 연극-그림을 보여주며 연극하듯 설명함)로 다케야마 대위의 어릴 때 학교 다니던 모습과 용감하게 전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장마 때 개울물이 차서 옷과 가방을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었다. 그는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전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미국 비행기가 일본 본토까지 폭격하기에 이르렀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시민들은 시골로 소개되고 계속되는 공습으로 많은 건물과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선산 주재소 사이렌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며, 면민들을 불안으로 떨게 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운동장 구석으로 나가서 엎드렸다.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기다렸다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다시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면에서는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게 했다. 우리집에도 마당에 방공호를 파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그러나 논에서 살다시피 하는 농민들이 한가롭게 그 안에 들어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우리집 방공호는 겨울에 무와 배추를 저장하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빈곤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세월은 물처럼 흘러갔다. 내 나이도 9살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노력 동원과 군사 교육만 하고서도 3학년으로 진급했다. 집에서는 이제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나무하러도 보내고, 소 풀도 뜯고, 소먹이로도 내보냈다. 우리 집 소는 작은 암소였다. 골목이 좁아 황소가 끌 수 있는 큰 달구지가 집안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고, 큰 황소를 살만한 여유도 없었다. 거름을 실어 나르거나 나락을 싣고 집으로 들어오기에는 암소가 제격이었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달려오면 바로 소를 몰고 들이나 산으로 가서 풀을 뜯겨야 했다. 칠팔월 긴긴 해에 모자도 없이 뙤약볕 아래 소고삐를 쥐고 서 있으면 배도 고프고 더위를 이겨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도랑을 따라 내려가다가 감자 밭이 보이면 감자 한 알을 몰래 뽑아 도랑물에 대충 씻어 입으로 껍질을 깎으며 먹었다. 그러면서도 소고삐를 꼭 붙들고 그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잠깐 한눈을 팔면 소는 그사이에 목을 길게 뻗어 논 안에 총총 서있는 나락을 한입 뭉텅 뜯어먹는다. 나는 논임자에게 들킬까봐 질겁하고, 쇠코뚜레를 잡아 쥐고 고삐 줄로 사정없이 소머리를 후려친다. 도랑 안에 서 있는 소는 꼼짝 못하고 얻어맞는다. 소는 겁먹은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금세 불쌍한 생각이 들어 코뚜레를 놓아준다. 우리 소는 참 순했다. 쪼그만 나한테 그렇게 얻어맞고도 한 번도 떠받으려고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창식이네 집 황소는 내가 그 곁에 가기도 싫었다.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에게 한 번이라도 떠받쳤다 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서당골 창식이가 제일 용감하고 멋있는 아이로 생각했다. 그는 아주 크고 무섭게 생긴 황소를 거침없이 몰고 다니며 풀도 먹이고, 집으로 올 때는 그 등에 타고 발로 소배를 차면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야산에서 동네 소가 한데 어울려 풀을 먹일 때, 그는 장난으로 황소 사타구니 밑으로 들어가 커다란 황소 불알을 잡아당겼다. 뒷발질을 잘하는 그 황소가 쪼그만 창식이를 걷어찰까 봐 조바심을 하며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란 듯이 불알을 더 길게 잡아당겨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소먹이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나는 얌전한 우리집 암소가 참 좋았다. 나는 키도 작고 몸도 약해 그 암소가 내 격에 딱 맞았다. 그래도 우리 소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논두렁에 소를 몰아넣고 풀을 먹이면 양쪽 둑에 연한 풀이 많아 소는 맛있게 풀을 잘 뜯어 먹고, 짧은 시간 안에 배가 뿔룩하게 불었다. 집으로 올 때는 큰 도랑에 소를 몰아넣어 물을 실컷 마시게 했다. 집에 오면 할아버지는 불룩한 소의 배를 두드려 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셨다.
소 먹일 때의 해는 너무 길었다. 뙤약볕에 소만 붙들고 서 있는 시간은 정말 길고 지루했다. 넓은 들판을 보면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람과 소뿐이었다. 사람과 소가 삼복더위에도 그늘 한 점 없는 들판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지만 소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랐다. 한국의 소는 정말 순종형이다. 창식이네 황소도 내가 무서워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그 소는 달구지도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것을 끌고 다니며 들에 있는 모든 짐을 실어 날랐고, 그 넓은 들을 다 갈고 썰었다. 김천 장날이면 왕복 80리 길을 장꾼들의 짐을 바리바리 싣고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종일 걸었다. 발바닥이 닳아 발굽이 떨어져 나가려고 하면 짚으로 덧신을 만들어 갈라진 발굽 사이에 끼워 신겼다. 평생 험하고 힘든 일속에 묻혀 살아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월은 황소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농촌의 칠팔월의 긴 해가 마음과 몸을 무겁게 짓누르며 소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때면 나는 소고삐를 소잔등에 얹어 놓고 그 뒤만 따라가면 우리 집에 닿게 된다. 우리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꼬불꼬불 찾아가기가 쉽지 않지만 우직한 소는 어김없이 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당 가운데 멍석에는 들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 둘이 앉아 있다. 부엌에는 나이 어린 새댁이 호박범벅을 하고 있다. 새댁은 같은 동네에 사는 오 씨 집안의 맏딸이었는데 우리집 작은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숙모님 댁도 우리집 만큼 가난했다. 남의 땅 몇 마지기를 부쳐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 집은 딸 둘, 아들 하나였는데 한 사람도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숙모는 아주 어릴 때 부산에 있는 어느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월급보다 삼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미혼 여성들을 차출해서 부족한 일손을 돕게 하고, 멀리 남양군도로 보내어 위안부로 봉사케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여러 방직공장에서 일을 시키다가 일본이나 동남아로 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유인하여 결국 그곳에서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어린 아이들의 육신을 짓밟아 놓고 말았다.
숙모님의 부친은 이런 소문을 어떻게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딸이 혼인을 해야 한다며 데리고 왔다. 어린 딸을 가진 집에서는 정신대 동원에 빠지려고 나이도 차기 전에 혼인을 서둘렀다. 숙모님도 작은 아버지와 혼인할 때의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숙모님은 방직공장의 생활상이나 거기서 함께 일하던 직공들이 일본이나 동남아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오명이 된다는 자격지심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너무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키는 일만 꼬박꼬박 했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연 몰랐던 것 같다.
젊은 숙모님은 내가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밑에 있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던지 나에게는 참 잘 해주었다. 학교에 늦지 않게 밥도 일찍 해주고 말 한 마디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래도 구름이 짙게 낀 날이든지 비가 오는 날은 시계가 없으니 지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날은 벌로 맞은 손바닥을 보여주면 무척 미안해했다.
종일 소를 먹이고 늦게 집에 들어오면 멍석 위에 저녁상이 나오는데 모두가 호박범벅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야 말이지 매일 저녁에 쌀 한 톨 없는 죽이다보니 입이 짧은 둘째 작은아버지는 죽에다가 고추장을 벌겋게 풀어서 들어 마셨다. 나도 그렇게 따라 해서 겨우 저녁을 때웠다. 그러나 어쩌랴, 쌀은 항상 달랑달랑 하고 전쟁 말기에는 점심과 저녁은 밥을 못 해먹게 관청에서 지시를 해 놓았다. 그 영을 어기는 집이 있을까 하여 갑자기 단속반을 내려 보내기도 했다.
쌀 두지는 큰 방 안에 있는 골방에 들어 있었다. 날이 새면 아침 일찍 숙모가 바가지를 할머니 방에 들이밀면 할머니는 온 식구가 먹을 만큼 쌀을 내어주는데 그 양은 아주 적었다. 숙모는 처마에 매달린 삶은 보리쌀을 섞어 밥을 짓는데 언 듯 보면 새까만 보리쌀만 보였다. 관청에서는 아침마다 밥짓기 전에 쌀을 한 움큼씩 따로 떼어 작은 단지에 모아두었다가 군량미로 바치라고 했지만 집집마다 거저 흉내만 내었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것을 보국이라 했지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아예 쌀이 떨어져 아침부터 꽁보리밥이나 죽을 쑤어 먹어야 하는데 따로 모을 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쌍한 것이 어린아이였다. 먹는 것이 부실하니 어미 젖이 잘 나오지 않아 일찍 젖을 떼게 되고, 미음을 끓여먹이다가 밥을 먹여야 할 때가 되어도 꽁보리밥을 먹이니 어린 창자 속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되지 못했다. 설사를 하고 배가 아파 칭얼대니 부모들이 더 못할 노릇이다. 태어나서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많으니 한 돌이 지나서야 겨우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내 둘째 동생도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달이라는 아명만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때 아버지는 안동철도국 관내에서 근무했는데 아이가 위독하니 할아버지를 빨리 오시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가 숨이 넘어가는 모습만 보고 선산으로 내려오셨다. 할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그 슬픈 장면을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어린 것을 안고 있던 애미가 그 놈이 숨이 넘어가자 부엌으로 나가더니 저녁 준비를 한다고 떨거럭 거리니.........원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그 불쌍한 것이.........."
목이 메어 말씀을 잊지 못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는 뒤 안으로 가서 혼자 울었다.
방학 때 아버지한테 갔을 때 달이를 안아주기도 하고 기어 다니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보살펴 주었던 기억이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나는 그를 방학 중에 한 번 밖에 보질 못하고 헤어졌다. 그 뒤 나는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나와 가장 친한 종수 집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종수 누나는 먹을 것이 없으니 일찍 객지에 나가 밥벌이를 했다. 그때 누구 꼬임에 빠졌는지 아이를 하나 낳아 데리고 왔다. 돈벌이는 해야 하고 아이를 키울 수는 없으니 종수 집에 데려다 놓았다. 종수 어머니는 딸의 소행이 미워 온갖 욕을 다 퍼부었지만 어린 것이 불쌍해서 데리고 키웠다. 그러나 어린 것은 부모도 없이 혼자 외롭게 크다보니 항상 배가 고팠다. 그는 밤만 되면 부엌에 들어가 쌀 두지에서 쌀을 훔쳐 먹었다.
하루는 밤중에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혹시 쥐가 곡식을 파먹는가 싶어 종수가 고양이 소리를 냈다.
"야웅, 야웅."
어린 것은 그 소리가 무섭기도 하고, 가만히 쌀을 훔쳐 먹은 것이 들켜 겁도 나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린 것은 종수한테 몇 대 쥐어 박혔다. 그 후 그는 생쌀을 대중없이 밤마다 먹은 것이 탈이 되어 방바닥에 엎드려 아픈 배를 눌러 참았다. 매일 배를 안고 방바닥을 나뒹굴었으나 약 한 첩 먹여 보지를 못했다. 집안 형편은 너무 어려웠다. 결국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어린 것은 먼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종수는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고는 고개를 묻고 컹컹 울었다.
숙모님 댁에도 슬픈 사연이 있었다. 숙모님은 우리집으로 시집 와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보니 친정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집은 우리집에서 500m도 안 되는데 자주 가볼 시간이 나질 않았다.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부친이 아들 하나만 데리고 사는데 그 아들이 온전하질 못했다. 언니는 같은 동네에 시집와서 가까이서 지내지만 그의 형편도 숙모님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세상일은 엎친 데 덮친다고 남동생 용덕이가 정신병을 앓게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처녀를 좋아하다가 상사병이 들었다고 했다. 선산에는 정신병원도 없었지만 병원에 갈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용덕이가 귀신이 들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부터 해오던 치료 방법이 있다고 했다. 용덕이를 멍석에다 둘둘 말아 싸 매 놓고는 작대기로 멍석을 사정없이 때려 패대기 시작했다.
"귀신은 퍼떡 나가거라. 안 나가면 더 패줄 끼다. 썩 나가거라, 이 못된 귀신아!."
그것을 보던 나는 무서운 생각만 들었다. 귀신은 말만 들어도 무서웠다.
얼마 후 용덕이를 꺼내놓으니 그는 넋이 빠져 눈만 크게 뜨고 그냥 누워 있다. 그의 부친은 용덕이를 업고 집으로 갔다. 얼마 있지 않아 용덕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그의 아버지도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그 집은 귀신이 나온다고 아무도 살 사람이 없었다. 작은 아버지는 그 처갓집을 헐값으로 사서 둘째 작은 아버지가 혼인을 하고도 집이 없어 전전하던 것을 그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정신대에 붙들려 가지 않으려고 열다섯에 시집을 온 작은 숙모님은 참 예뻤다. 나는 매일 그 집으로 가서 숙모님을 만나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귀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바람이 치는 그믐밤에도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6. 끝나는 전쟁
이문동 소비조합 앞에는 밤이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라디오가 있는 집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비조합의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다. 소비조합 건물은 아주 요긴한 곳에 세워져 있다. 이문동의 사통팔달 네거리에 세워놓았는데 남쪽으로는 김천으로 가는 길이고, 북쪽으로는 선산면사무로 가고, 동쪽으로는 연봉리를 거쳐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서쪽으로는 무을면을 거쳐 상주로 가는 길이 된다.
소비조합에서는 외등을 밝게 켜 놓아 동네 사람들이 서로 반갑게 만나는 장소가 되도록 배려했다. 긴 나무 의자도 몇 개 내다 놓았으나 길이 방해되지 않도록 건물 쪽으로 바짝 다가놓으니 서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아이들은 창문 위에 높이 달아놓은 라디오를 쳐다보며 일본말로 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때로 전쟁을 부추기는 군가가 나오면 그것이 무척 반가웠다. 어른들이 부르는 군가를 따라 부르다보니 내용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곡조는 하루 두 번만 들어도 다 부를 수 있다.
동네 어른들에게 가장 관심을 가진 뉴스가 대본영 발표(大本營發表)였다. 대본영은 일본군 총사령부다. 대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던 1942년에는 매일 승전을 알리는 소식과 힘찬 군가가 흘러 나왔다. 미국 대통령 루스베르토(루스벨트), 영국 총리 차치루(처칠), 중국 총통 쇼가이세키(장개석) 등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지만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잘 몰랐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문맹자들이니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본영 발표 뒤에는 꼭 해설자가 나온다. 소비조합장이나 동장이 일본말을 통역해 주고 농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황을 해설해 주었다.
진격의 소리가 우렁차던 전세는 해가 지나면서 차츰 기울어져갔다. 1944년이 되자 절망적인 소식만 전해 왔다. 어느 섬에서 일본군이 옥쇄(玉碎)했다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그 말은 전원이 전사했다는 뜻으로 충절을 위해 구슬이 깨지듯 깨끗이 죽었다고 미화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전원이 전사하는 패전이 이어지자 옥쇄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동네 사람들도 점점 불안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구호를 외치게 했다.
"사이판 도를 잊지 말자!"
그해 6월에 15일,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으로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미 해군과 결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는 바로 기동부대를 출동시켜 마리아나 해전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사이판 섬에서 일본군 수비대는 4만4천여 명이 전사하고 미군에게 섬을 함락 당했다.
일본 정부는 이 치욕을 적개심으로 전환하려는 심리전으로 이 구호를 부르짖게 했다. 어린 우리에게까지 노력 동원에 성과가 적으면 태만하다고 하여 이 구호로써 닦달을 가하곤 했다.
학교에는 '청년특별훈련소'를 만들어 놓고 운동장에는 그들이 매일 훈련을 했다. 혈기가 왕성한 조선인 다케다 선생도 참여했는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 더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멀리 교장실에서는 일본인 교장이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조선인 선생들은 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인 교장이나 선생들의 신경은 무척 날카롭게 변했다.
아이들은 시간을 마치면 운동장에서 '청년특별훈련소'의 대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훈련 방식이래야 목총을 들고 제식 훈련, 사격 훈련, 백병전 훈련이 고작이었지만 목총도 모양이 정교하지 않고 대충 총의 모양만 갖추어 우리 눈에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 말기에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해방이 되고 난 뒤에도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어린 우리들도 전투모를 쓰고 옷도 국방색으로 통일시켰다. 흰 무명옷밖에 없는 아이들은 풀을 뜯어 그것을 옷에 문질러 국방색을 내려고 했지만 그 모습은 참 보기가 어색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시범 훈련을 하는 건지 가끔 전투비행기가 낮게 떠서 동네 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2대 이상 편대를 지어 나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겨우 한 대가 저공으로 날아 군민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군에서는 성금을 모아 비행기를 헌납했는데 어떤 부자는 혼자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기도 했다.
한번은 전투기 한 대가 낮게 날다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감천강 뚝에 불시착했다. 그것도 정확성이 부족하여 모래사장에 곤두박질 쳤다. 우리는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감천강으로 뛰어가 보았다.
비행사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 중에 계급이 높은 군조가 하위 병사에게 명령을 했다.
"비행기의 동체를 덮어라."
"무엇으로 덮습니까?"
"포플러 나무라도 베어서 덮어라!"
"옛!"
우리는 그 대화가 신기했다. 두 사람의 모습과 말투가 호기심을 끌어 그 뒤 우리는 그 대화를 몇 번이고 흉내 내었다. 비행기는 분해되어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가져갔다.
많은 남성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아이들도 남녀를 불문하고 일꾼으로 동원되었다. '근로 봉사'라는 이름 아래 학교를 떠나, 일손이 부족한 농가와 산에서 솔 괭이를 따서 모으는데 강제 노동을 했다.
뒷산에서는 매일 기름을 짰다. 드럼통에다 솔 괭이를 넣고 거기다 불을 때어 달구면 기름이 흘러나왔다. 이 기름을 드럼통에 넣어 어디론가 싣고 갔다. 군함을 이 기름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어린 우리의 생각으로도 너무 원시적인 작업이고, 소나무 괭이에서 나온 끈끈한 기름의 힘으로 배가 가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자가 점점 더 귀해지자 집안에 있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 쇠로 만들어진 것은 모조리 거두어갔다. 부잣집에서는 대대로 조상을 섬겼던 제기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우물 안에 숨겨 놓았다가 발각이 되어 주재소에 붙들려 가서 혼이 나기도 했다.
쌀이 부족해지니 아침 외에는 보리밥도 지어먹지 못하게 했다. 점심과 저넉은 죽을 먹어라 했다. 우리집에는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매일 죽으로 연명을 하는데 어쩌다 국수를 해 먹는 날은 참 맛이 좋았다. 어느 날 모두 들에 나가고 나 혼자 집에 있는데 칼을 찬 순사가 들이닥쳐 부엌에 밥이 있는가를 조사했다. 부엌은 땔감이라곤 짚뿐이니 온통 연기가 꽉 차서 온 벽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벽에는 파리가 많이 앉아 알을 쓸고 거기서 생긴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 다녔다. 찬장이라곤 사과 궤짝을 엎어 거기에 그릇을 얹어놓았으니 음식 냄새를 맡은 파리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덮어놓은 바가지를 열어보니 멀건 호박죽이 들어 있었다. 물은 멀리 공동 우물에서 한 동이씩 머리 위에 얹어 나르니 물이 귀해 어느 구석 깨끗하게 닦여진 데가 없었다. 순사는 못 볼 것을 본 듯 상판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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