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는 일제강점기 때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포항시가 방치된 일본인 가옥 등을 보수해 2010년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재단장하면서 현재는 국내외 관광객이 꼭 들르는 곳이 됐다.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생생한 증거물이자 산 교육장이 된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흔적이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다. 도가와는 구룡포항 확장에 앞장선 인물이다. 1944년 구룡포 거주 일인들이 그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웠다. 하지만 해방 후 주민들이 송덕비에 시멘트를 덧발라 흔적을 없애버렸다. 당시 분위기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달리 처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일제에 의한 치욕의 역사 현장으로 치자면 서울 남산만 한 곳도 없다. 남산에는 조선신궁을 비롯 노기(乃木)신사, 일본공사관과 통감부'통감관저'총독부 등이 있었다. 현재 예장동 일대 남산 자락에는 일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왜성대(倭城臺)라 불렀다.
무엇보다 통감관저는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통감 데라우치와 강제합병 조약에 도장을 찍은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인 2010년 시민단체가 통감관저 터의 표석 설치를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통감관저 터'를 명시하면 일본 극우세력이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철종 때 세운 '녹천정(鹿川亭) 터' 표석을 세우기로 결정하자 큰 반발을 샀다.
이 터에는 1905년 당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는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다. 1936년 일제는 그의 희수(77세)를 맞아 관저 앞뜰에 동상까지 세웠다. 해방 후 동상은 파괴됐고 현재 '남작 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인 전면 좌대 등 일부만 방치된 채 남아 있다.
서울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수습한 좌대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거꾸로 박아 세우기로 했다. '일'한 병합'의 3대 영웅으로 불린 하야시의 동상 비석을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복원하는 셈이다. 이처럼 흔적을 아예 없애는 것보다는 시민과 일본인들에게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국내외에 '위안부 소녀상'을 계속 세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 유무형의 일제 잔재가 여전히 많다. 어떻게 살아있는 역사 교재로 삼을지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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