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위기의 러시아 시장과 공감의 기업문화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1998년 러시아 국가 부도 위기 때

日 기업 떠났지만 한국은 함께 버텨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 10년간 인기

또 위기… "어려워진 친구 못 버려"

지난 15일부터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경제통상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함께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문화 탐방 및 현지 진출 한국 기업 방문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경제 제재와 유가 하락의 여파로 러시아는 현재 2년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1달러당 30루블 선이던 환율이 작년부터 곤두박질치더니 지금은 70루블에 육박하고 있다. 그네들의 삶도 힘들 것이지만, 이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도 죽을 맛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루블로 아무리 많이 팔더라도 달러로 정산을 하면 매출도 이익도 모두 반 토막이니 보통 어려운 상황이 아닌 것이다. 어느 주재원은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만 있는 중'이라고 현재 상태를 표현했다.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은 러시아에서 최근 10여 년간 엄청난 인기를 누려왔다. 삼성은 여러 해 소비자가 뽑은 최고의 기업으로 꼽히고 있고, LG는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가전 분야에서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으며, 현대와 기아는 러시아 소형차 시장을 장악하면서 지역 친화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기업에 대한 호감도와 맞물려 우리나라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현지 법인을 방문하고 주재원들을 만나보면서 느낀 것은, 첨단 기술 도입이나 우수한 품질, 합리적인 가격 등 직접적인 시장공략 요인뿐만 아니라 지역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에서 이런 성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시장과 고객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그리고 진심을 다한 친구로 대한 수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98년 국가 부도 위기 당시 러시아 시장을 지배하던 것은 일본 기업들이었다. 소니와 파나소닉 등이 가전시장 대다수를 점유했으며 한국 제품들의 인지도는 현저히 떨어졌었다. 그런데 경제 위기 이후 상황은 역전된다.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루블화 가치가 떨어지고 경제성이 없어지자 일본기업들은 가차 없이 떠났지만, 한국 기업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러시아에서 잘 견뎌냈다. 이후 푸틴 집권과 더불어 러시아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소비자들은 그들이 힘들 때 떠나지 않고 함께해 준 한국 기업의 상품들을 선택했다.

우리 기업 역시 러시아인들의 선택에 시장의 논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삼성은 톨스토이 문학상을 제정하여 우수 작가를 시상하고 에르미타쉬 미술관과 볼쇼이 발레단의 스폰서로 그들이 사랑하는 문화 예술에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LG는 승전 기념일에 2차대전 희생자들에게 헌화하고, 러시아의 축일을 함께 축하하는 것으로 공감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차는 볼쇼이 발레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신차를 광고하고, 모스크바 중심가에 갤러리형의 쇼룸을 운영하면서 문화를 사랑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장밋빛 소통의 와중에 또다시 다가온 위기의 순간이다. 떨어진 루블화 가치에 관광객들은 늘었지만 정작 현지인들의 얼굴엔 주름이 깊고,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판매를 하면 하는 대로 기업들은 손해를 보는 상황이란다. 이런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라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힘들지만 러시아인들과 함께 버티고 있다는, 친구가 어렵다고 친구를 버릴 수 없지 않으냐는 주재원의 대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람과 문화, 그리고 비즈니스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도 결국은 신뢰에 기댄 소통의 장이며, 상대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고, 그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기 마련이다. 러시아 시장의 예에서 보듯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것보다는 때로는 기다림과 고통의 분담이 미래의 더 큰 발전적 관계를 담보해 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는 시장과 비즈니스의 확대를 넘어서서 통일 이후 다가올 신동북아 시대, 새롭게 재편될 동북아의 질서 속에서 신뢰 가능한 동반자를 얻을 가능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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