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11>금오산이 낳은 인물 초인 박정희(하)

"나라 일으켜세우려면 인재 필요" KIST 설립해 과학자 우대 정책

박정희가 이뤄놓은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전 세계가 놀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모심기를 하는 모습.
박정희가 이뤄놓은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전 세계가 놀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모심기를 하는 모습.
포스코 설립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이 포스코를 키워낸 박태준 회장과 함께한 모습
포스코 설립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이 포스코를 키워낸 박태준 회장과 함께한 모습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광복 70주년 기념 한국 경제사 관련 인식조사' 결과(19세 이상 남녀 800명 대상)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힘은 국민 38.6%가 지목한 '새마을운동'이었다. 두 번째는 32.5%가 꼽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고, 세 번째는 국민 15.8%가 지목한 '88서울 올림픽'이었다.

또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잘살아보겠다'는 의지로 국민 58.8%가 꼽았다. ▷교육열에 기반한 인재 양성(14.4%) ▷정치적 리더십과 체계적인 정부 정책(11.1%)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8.8%)이 그 뒤를 이었다. 위 항목 중 '88서울 올림픽'을 제외한 항목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이 키웠고, 국민을 키웠다

어린 시절 박정희의 집은 가난했다. 수재들이 다니는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한 덕분에 수업료를 면제받았지만 기숙사비와 식비는 내야 했다. 기숙사비가 밀리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 돈이 마련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못했다. 2학년 때는 10일, 3학년 때는 40여 일, 4학년 때는 48일, 5학년 때 41일을 결석했다. 수업에 빠지는 날이 많았기에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했고, 형들이 도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구미와 선산 주민들은 '금오산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나섰다. 구미면장과 곡물검사소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힘을 보탰다. 덕분에 박정희는 유급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했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의 월사금을 대신 내주었다. 그래서 보통학교 교사의 월급이 넉넉한 편이었음에도 그는 가난하게 지냈다. 기숙사비를 내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구미 사람들이 도와주었듯이 자신도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다.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박정희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는 본격적인 인재 양성 정책을 폈다. 1962년 11월 과학자 우대정책을 발표했고, 1966년 1월에는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했으며, 2월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발족했다.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고, 1971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를 시행해 취학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1977년에는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취직한 사람들을 위해 산업체 부설학교, 특별학급을 설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맏딸 박근혜를 1970년 전자공학과(서강대학교)에 입학시킨 사실은 그가 얼마나 기술인재 양성에 주목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누구도 한국의 성공을 믿지 않았다

1960년 영국 외무부는 '한국은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 별 가망이 없는 나라다. 국민은 게으르고, 문맹률이 높으며, 정치적으로 미숙하며, 경제는 빈곤이 겹친 나라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몰라 위험하다'고 기술했다.

이에 앞서 1955년 10월 UN 한국재건위원회 인도 대표로 한국에 온 메논(Menon)은 방문 뒤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던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역시 종전 뒤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 나라가 재건되는 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은 전 세계의 비관적 평가를 깨고 보란 듯이 일어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도전정신과 개혁정신, 애민정신으로 가난과 폐허로 전락한 국가, 절망과 무기력에 허덕이는 국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 현실을 돌파했다. 박정희의 애민과 도전정신은 청년 시절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박정희가 다닌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는 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 등이 섞여 있었다. 군관학교 측은 일본인 생도들과 다른 민족 생도들을 차별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쌀밥을 배식하고, 다른 민족인들에게는 잡곡밥을 배식했던 것이다.

배식 문제로 일본인 생도와 조선인 생도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며칠 뒤 일본인 생도들이 조선인 생도 한 명을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족 간 갈등의 골이 극에 달했고, 박정희는 보복으로 일본인 생도 한 명을 때려눕힌 다음 '민족 대표끼리 한판 붙자'고 제안했다.

일본인 생도 대표로 나온 사람은 유도 유단자로 덩치가 박정희보다 훨씬 컸다. 일본 생도들은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라며 여유롭게 웃었고, 조선인 생도들은 싸움을 하기도 전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유도 유단자인 일본인 생도를 때려눕혔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조선인 생도들의 사기는 치솟았고, 일본인 생도들은 이전처럼 조선인 생도들을 깔보지 못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박정희는 각국에 차관을 얻고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가망 없는 나라에 돈을 빌려 줄 나라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차관 대신 소액의 무상 원조를 제안했다.

거듭 거절당했지만 박정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답보 상태에 있던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해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재정자금 2억달러, 기타 상업차관 3억달러를 끌어들였다.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는 야당 정치인들과 대학생 시위대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 시위를 진압했다.

1964년 12월에는 당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에게 "우리 국민들이 굶고 있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우리는 거짓말 안 한다. 라인강의 기적처럼 우리도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다"며 차관을 요청했다. 서독 정부는 1억5천만마르크 차관 제공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지급보증을 요구했다. 당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 은행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아올 능력이 없었다.

양국은 한국이 탄광 노동자와 병원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고 그들의 3년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의 지급보증을 받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3천, 4천m를 내려가 석탄을 캤고, 간호사들을 시체를 닦았다.

영화 '국제시장'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그렇게 한국에 종잣돈을 보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평가는 역사에 맡기고 앞만 보고 달려

한국의 놀라운 성장에 주목했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1979년 10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에너지를 언론과 여론의 호의적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오직 일하는 데 집중하고, 평가는 역사에 맡깁니다. 만약 대통령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우리 선대들의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교육열, 정치지도자들과 창업 1세대의 불굴의 도전정신은 갖은 난관을 해결하고 선진국 문턱까지 나라를 이끌고 왔다.

그러나 후대는 의심하고 분열하고, 두려워하며 주저한다. 일부 지도자들은 당대의 인기와 이익을 위해 미래를 갉아먹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의 마음을 통합하고, 제2의 새마을운동, 제2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끌 리더십과 자기희생 정신을 가진 초인이 절실한 시점이다.

◆오늘날의 실패가 박정희 탓?

일부 시민운동가들과 경제학자들은 '박정희식 독재 경제가 오늘날의 재벌 독점, 양극화 폐단, 빨리빨리 고질병' 등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박정희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시절 그만한 독재를 했으면 그만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한국이 경제개발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두 번째 지적에 대해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이며 사회철학자인 복거일 씨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되거나 건국한 국가 중에 우리나라처럼 제대로, 일찍 성공한 사례가 있는가? 누구나 박정희처럼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하려면 그런 사례를 하나라도 제시해야 한다. 박정희가 이끌었던 대한민국처럼 성공한 나라는 지구 상에 없다"고 말한다.

또 박정희식 독재 경제가 오늘날의 재벌 독점, 양극화 폐단 등을 만들었다는 말은 일견 일리 있어 보이지만 무책임하다. 만약 그런 식의 논리가 인정받으려면 아직도 박정희가 통치하면서 정치와 경제 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어야 한다. 박정희는 가난과 절망에서 우리나라를 구하는 역할을 했고, 미래의 초석을 다졌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재벌은 적어도 1980년대 후반까지 우리 사회에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 뒤에 늘어난 재벌의 해악적 요소는 후대의 숙제다.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부가 재벌을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자본주의 400년 역사에 이처럼 빠르게 고도성장한 예가 없을 정도로 성공했다. 그 성공의 결과가 재벌을 낳았고, 지금의 실패를 낳고 있다. 국제기구나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도 공통적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한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에 성공했던 주요 이유가 첫 번째는 독재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정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뒤에) 경제규모가 커지니까. 정부가 시장 구석구석을 다 통제할 수 없고, 정부가 힘을 잃어버렸고 기업의 힘이 커졌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1987년 민주화가 과거의 질서는 무너뜨렸지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오늘날 재벌이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서, 재벌에 명은 없고 암만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지난 1960년대부터 30년 동안은 재벌의 순기능이 잘 발달했는데, 그게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변화시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과거의 성공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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