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잔인한 시대의 아픈 이바구<4>-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일본이 미국한테 항복했다 칸다" 너나없이 "조선독립만세!"

삽화: 이영철 화가
삽화: 이영철 화가

1944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노동자와 병력이 부족하여 강제 연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연행된 인원은 조선 전체에 100만 명도 넘었다고 했다. 주로 인구가 많은 조선 남부지역의 주민들이 많이 차출되었는데 생활이 어려운 농민과 노동자가 많았다. 세력이나 재산이 있는 조선인은 연행하지 않은 대신 일제는 그들을 조선의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용했다.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는 탄광이나 토목·건축 공사 아니면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지식이 필요한 공장 노동자로는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데려갔다.한편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을 전쟁터에 동원했다. 나는 매일 전쟁터로 나가는 청년들의 환송식에 참석했다. 비봉산에 있는 신사 앞에서 어린 학생들이 줄을 서서 환송식에 참석했다. 우리 앞에는 어깨띠를 한 청년들이 10여명 열을 지어 서 있다. 먼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군수나 면장이 격려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장기를 흔들면서 노영(露營)의 노래를 합창했다.

갓테 구로조토 이사마시쿠

지캇테 쿠니오 데타카라와.........

이기고 오겠노라 씩씩하게

맹세하고 고향을 떠나왔으니

공을 세우지 않고 죽을까소냐

진군 나팔 울려 퍼질 때

눈동자에 서린 깃발의 파도

뜻도 다 모르는 노래를 신명나게 불렀다. 내용은 몰라도 곡이 흥을 돋우었다. 그러나 듣기 좋은 꽃노래.......라고. 너무 자주 그리고 강압적으로 부르라고 하니 짜증이 났다. 우리는 철없이 일본 노래를 우스갯말로 개작하여 불렀다.

갓데 구루마 발통 누가 돌렸노

집에 가서 생각하니 내가 돌렸다.

이것을 들은 일본 선생이 우리를 불렀다. 볼퉁이에 곶감분이 나도록 얻어맞았다. 그래도 조선말로 개작하여 일본말을 비꼬는 이 노래는 그쳐지지 않았다. 동사무소에서 노인들을 모아 일본말 교육을 할 때도 어깃장을 놓는 이들이 있었다.

"히노마루노 하타(日の丸の旗-일본기)"

"희한하기도 하다."

동직원도 말리질 못했다.

징용이나 징병 차출을 담당하는 사람은 우리 동네 부잣집 심상호의 아들 심 주사였다. 그는 힘없고 만만한 집 청년부터 잡아 보냈다. 돈이 좀 있거나 이름이 있는 집에서는 그에게 돈줄을 대거나 인맥을 동원하여 자기 집 아들을 빼냈다. 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자 선산면의 인원도 한계를 드러내어 거기서 빠지기도 쉽지 않았다.

노력 동원으로 학교에서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일거리를 억지로 만들었다. 어느 선생의 창안이었던지 낙동강 황무지에 땅콩을 심어 부국하자고 했다. 전교생이 이십 리는 족히 되는 낙동강까지 가서 모래사장에 땅콩을 심었다. 오뉴월 한창 더운데 그늘도 없는 황무지에서 종일 일을 했다. 싸가지고 온 점심은 먹었으나 목이 말랐다. 수통을 가지고 오는 아이는 한 반에 다섯 사람도 되지 않았다. 우리집에도 수통이라고는 원래 없었고 빈병도 귀해서 준비하지를 못했다.

일을 마치고 천여 명이나 되는 전교생이 고개를 넘어 집으로 오는데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동네 앞을 지나다가 공동 우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물을 서로 먹으려고 싸움이 벌어졌다. 땡볕 아래 종일 모래사장에서 일을 했으니 얼마나 목이 탔겠는가. 두레박으로 길러 올리는 물은 그 많은 학생의 차례를 빨리빨리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숨은 모질었다. 그 많은 학생이 그 우물 하나로 목을 다 축였는데 쓰러진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징병, 징용으로 젊은이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일본 규슈 탄광으로 붙들려 가고 나니 농촌에는 절대 일손이 부족했다. 결국 어린 우리들까지 산으로 들로 동원되었다. 모심기철은 되었는데 손이 부족하니 어린 아이들이고, 연약한 여식 아이들이고 간에 가려내고 기다리고 할 여유가 없었다. 모심기에 동원된 전교생은 넓은 선산 들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모두 농촌에서 커서 본 것도 있고, 실제로 집에서도 일을 하여 모심기 정도는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전 일이 끝나고 모두 논두렁에 앉아 싸가지고 온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 벤토(도시락)가 없는 아이들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왔다. 죽을 싸온 아이도 있었다. 그것도 쇠 밥그릇은 공출로 다 바치고, 나무 밥그릇에 담아왔는데 거의 꽁보리밥에 반찬은 생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짠 장아찌뿐이었다. 그것도 못 싸온 아이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개구리를 잡거나 논두렁에 날아다니는 큰 메뚜기를 잡고 있었다.

도시락을 다 먹고 쉬면서 끼리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야기라야 전쟁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비29, 비24, 구라망 전투기 등 미국 비행기와 하야부사, 제로센 전투기, 아카돈보(붉은 잠자리) 등 일본 전투기의 이름을 아는 대로 나열하면서 서로 아는 채를 했다. 그 비행기들은 대부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어른들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들어 아는 것들이었다.

그중 가장 크고 무서운 비행기가 비29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동쪽 하늘에 큰 비행기 여러 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주재소 사이렌이 죽는 소리를 내며 울어재낀다.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란 소리를 지른다.

"후세! 후세! (엎드려!)"

우리는 평소에 훈련 받은 대로 양쪽 귀와 눈을 손으로 꼭 눌러 막고 입을 크게 벌리고는 논두렁에 엎드렸다.

비행기가 아주 낮게 떠서 오는지 그 소리가 우렁찼다. 나는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비행기는 3대가 편대를 지어 바로 우리들 위를 지나가는데 무척 컸다. 그러나 프로펠러가 양 날개에 하나씩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비29는 아닌 것 같았다. 나대로 비24라 단정 지었다. 비행기 밑에는 큰 폭탄이 한 개 달려 있었다. 이때 폭탄 2개가 연달아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귀를 꼭 막고 있으니 폭탄 터지는 소리는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엎드려 있는 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가까운 곳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니 전교생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 모두 일어나 엄마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 집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속수무책으로 쩔쩔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집으로 달려가는데 하늘에는 조그만 일본 비행기 한 대가 미군 비행기가 가던 쪽으로 따라갔다. 뒤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큰 폭탄 한 개가 김천에 떨어졌는데 다행히도 불발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쳐다봤던 그 폭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동무들과 폭탄이 터진 곳을 가봤다. 그곳은 오동산이라 하여 조그만 동산이 5개 있었는데 거기다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동산 2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큰 웅덩이가 두 개 파여 있었다. 폭탄의 위력을 처음 보았는데 그것만 보아도 일본이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학교 운동장에는 죽창을 든 청년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미군이 상륙해 오면 국민 한 사람이 미군 한 명씩만 죽여도 이길 수 있다고 억지소리를 해댔다. 어린 마음에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7. 광복

4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내가 1935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1945년이 되었다. 꼭 10살, 농촌에서는 못할 일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다는 농사철에 작은 일손이라도 생기니 집에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일은 주로 소먹이고, 꼴 뜯고, 가끔 수박 밭을 지키는 일도 했다. 밭을 매기도 하고, 논에서 세벌논을 손으로 매기도 해보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매기는 기계로 하지만 세 벌 논은 벼가 거의 다 자라 줄기와 잎이 샜다. 때는 삼복더위 철이라 웃옷을 벗고 맨몸으로 매어도 땀이 비 오듯 했다. 무엇보다 온몸이 다 자란 나락 잎에 베여서 핏자국이 흉하게 드러났다. 모두 웃통이 따갑다고 했다. 나는 그 일만은 할 수가 없었고, 아예 작은 아버지도 나에게는 그 일을 시키지 않았다.

여름 일 중에는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지키는 것이 제일 쉽고 좋았다. 손이 부족하여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까지 들일이나 밭일을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내가 수박 밭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싸가지고 온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풋고추를 따서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그것이 꿀맛이었다.

여름 해는 왜 그리 긴가. 점심을 먹고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배가 고프다. 수박을 하나 따서 개울물에 담가 놓는다. 한여름 더위에 밭에 있는 수박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차게 식은 수박을 벌려 앉은 다리 사이에 놓고 반으로 뚝 잘라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끊어먹는 것보다 손실이 적다. 마지막에는 껍질에 구멍이 나도록 딸딸 긁어 수박 한 통을 다 먹는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싫어하실 것 같아 수박 껍질을 멀리 가져다 버렸다.

원두막에는 낮잠 자기가 참 좋았다. 대낮에 수박 훔쳐가는 사람은 없으니 마음 놓고 낮잠을 잔다. 원두막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내가 더욱 달게 자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면 사방으로 괴어놓은 햇볕 가리개를 내려 비바람을 피한다. 이웃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원두막 밑으로 몰려와서 소나기를 피한다.

8월 15일, 그날도 원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이문동 조환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일러준다.

"영아야! 해방이 되었단다."

"그게 무슨 소리고?"

"일본이 미국한테 항복했다 칸다."

그는 소비조합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이 감격해 하는 모습과 그 분위기를 소상히 알려주었다. 나는 어떤 감흥도, 어떤 감동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덤덤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의 공허한 생각은 감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비조합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뚫어지게 라디오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문동 동장이 동민들에게 중대 발표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는 바로 일본 천황이었다. 그의 발음은 뚜렷하지 않은 데다 잡음이 심했다.

"짐은 일본 정부에 미, 영, 중, 소, 4개국의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고 통고하도록 하명했다. 본래 일본 국민의 평온무사를 기도하고 세계 번영의 기쁨을 국민들과 공유하는 것은 대대 황실에 이어져 내려온 이념이자, 짐도 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일찍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한 이유도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연합국의 공동 선언을 일본이 수락한다는 것은 곧 항복을 의미했다. 천황이 연합국에 항복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장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즉 우리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었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동장은 유식했고 생각이 깊었다.

"아직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는지 모르니 당분간 조용히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급히 이 소식을 집에 전하고 싶어 헤어졌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조환이가 이 소식을 전하러 나에게 달려온 것이다.

해방이 되던 이튿날, 세상은 완전히 바뀌고, 다르게 변했다.

푸른 솔잎으로 시내 여러 곳에 아취를 만들고, 그 위에 태극기를 꽂아 놓았다. 모두가 그 아취 밑을 지나면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꿈의 나라로 들어서는 것처럼 느꼈다.

모두가 갑작스런 일에 궁금증이 더해 거리로 나와서 민중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몇몇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조선독립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소리는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일본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청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한다.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되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36년 간의 일본의 탄압,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조선 사람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자유롭게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독립만세!"

연설을 듣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니 너나없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간의 식민지 탄압을 회상하며 분을 삼키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워낙 일본의 통제가 심하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르게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젊은 사람이 무척 흥분하여 청중 앞에 나서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일본 놈들한테 얼마나 혹사당하고 고생을 했습니까. 당장 왜놈들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놈들을 패 죽입시다."

"옳소, 맞습니다!"

몇몇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이때 나이 지긋한 어른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젊잖게 말했다.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너무 흥분하면 안 됩니다. 먼 앞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솔한 행동이 우리에게 해가 되어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일본과 만주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에 있는 일본 사람을 해롭게 한다면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를 그들이 그냥 두겠습니까? 참아야 합니다. 아무리 분하고 원통해도 우리는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들의 행동이 억울하게 붙잡혀간 우리 동포들의 안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청중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옳다고 박수 치는 사람도 반대로 소리 지르는 사람도 없다. 침묵 가운에 그런 일은 해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산면에는 일본인의 집이 수십 채 있었지만 이런 와중에 돌멩이를 맞아 유리창이 깨진 집이 몇 채 있었지만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크게 해를 입은 집은 없었다.

버스 정류소를 운영하는 아라이상 가게도 심부름 하는 조선인 청년이 계속 문을 열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주인 아라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점방은 교통 요지에 있을 뿐 아니라 일용품을 일본에서 넉넉하게 가져다 두었기 때문에 선산에서는 가장 요긴한 가게가 되었다. 나는 돈이 없어 그곳 물건을 하나도 사 본 적이 없었지만 지나가다가 눈요기로 못 보던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참 좋았다.

나는 동무들과 이런 구경을 하러 다니느라 하루해가 짧았다. 밥 때를 놓치면서 정신없이 쏘다녔다. 우리가 제일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비봉산에 있는 일본 신사였다. 그렇게 소중하게 엄숙하게 모시던 신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동무들과 함께 길고 높은 계단을 올라갔다. 평소에 너무 성스럽게 취급하여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오르내렸는데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가기는 처음이다.

신사 앞에서 우리는 깜짝 놀랐다. 평소 고개도 마음대로 들고 쳐다볼 수도 없었던 그 장엄한 신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 위에 올라가보지 못했던 단위에 올라가서 신사가 서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신사를 들어낸 높은 단위에는 누가 똥을 한 무더기 누어 놓았다. 우리가 그렇게 공손히 합장한 손을 가슴에 얹고 절을 수없이 했던 그 신사, 일본제국의 가장 위대한 우상이었던 그 신사에 똥을 누다니.

전쟁에 지면 하루아침에 우상과 권위와 법이 무너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머리 속에도 한 순간에 그 위대한 천황폐하와 궁중 앞의 이중교,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이 한꺼번에 곤두박질을 쳤다. 아직 내가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저학년인데도 상급생들이 외우고 있는 조구고(일본 천황의 칙어)를 뜻도 모르면서 외우려고 애썼던 노력들이 비누 거품처럼 날아갔다. 나는 일본이 최고의 나라요, 일본 군대가 가장 강하다고 믿었다. 모두가 세계 제일이었다. 산까지 세계 제일이라고 외웠다. '세카이 이찌노 후지노 야마(세계 제일의 후지산)'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일본 천황의 족보를 순서대로 외웠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쇼와 천황까지 그 많은 이름을 다 외우려고 했다. 아직 거기까지 갈 나이도 학년도 아니었는데 열심히 일본 공부를 했다.

나는 '조선독립만세' 소리에 신기루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

할아버지도 내가 일본말을 쓰거나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지나간 일을 이야기 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것도 꼭 한 번밖에 듣지 못했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 일본 슈비타이(수비대 守備隊)가 비봉산에 올라가 읍내를 보고 총을 쏴재끼는데 모두 겁을 집어먹고, 아무도 밖에 나가질 못했어. 그때 일본 슈비타이가 제일 무서웠지. 그 뒤로 일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해야만 했어. 원, 참!."

그 후 나에게는 과거 조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주었을 뿐 아니라 내 성과 이름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학교에서 조선 이름을 알아오라고 했을 때는 아버지가 오셔서 한자로 쓰인 성과 이름을 적어주고 갔다. 그동안 나는 집에서 부르는 '영아'라는 이름이 내 본이름인줄 알았고, 학교에서 부르는 니시하라 히로시(西原 弘)가 정식 내 성이고 이름인 줄 알았다. 내 본명은 견일영이었다. 일영이라는 이름을 아명으로 '영'이라고 했던 것이 동네 아이들도 내 이름이 영아인 줄 알고 아예 부를 때 '영아야'하고 불렀다. 나도 내가 영아인 줄 알았다. 조국 광복, 해방은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고, 바른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2학기 개학을 했지만 학교는 어수선했다. 우선 일본 선생이 다 빠져나가고 없으니 선생님이 많이 부족했다. 여러 반을 합반하여 교사 수와 맞추게 되니 한 반의 인원이 많이 불어났다. 급한 대로 중학교라도 나온 사람은 임시 교사로 임용하였다. 선생님들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일본 교과서를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칠 교재나 새 지침서도 없으니 교사들은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국어는 한글 글자를 가르치고, 그 외 이과 산수 등은 일본 교과서를 우리말로 고쳐 가르쳤다. 그래도 노력 봉사, 군사 훈련 같은 것이 없으니 공부만 열심히 하게 되었고, 비로소 학교라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해방이 되고 열흘쯤 지난 날, 느닷없이 일본 다니 교장이 나타났다. 해방이 되고 폭동이 일어날까봐 겁이 나서 도망치다시피 일본으로 떠났던 그가 부산에서 배편을 얻지 못해 다시 선산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는 죽어도 학생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야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온 것이다. 아침 전교생 조회 시간에 그가 단상에 올라갔다. 그렇게 일본에 충성을 다하던 다케다 선생이 구령을 불렀다.

"기오쓰께!(차렷)"

이때 느닷없이 새로 들어온 낯선 선생이 다께다 선생을 밀쳐내더니 조선말로 다시 구령을 불렀다.

"기차!(차렷)"

우리도 놀랐고 다니 교장 또한 조선말 구령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에 온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나 저 무시무시한 원자폭탄 때문에 우리 일본제국은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학생 여러분의 노고와 전쟁 때문에 많이 손해를 입은 배움에 대하여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제 조선 나라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일본으로 다시 떠난다."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을 했지만 평소에 노래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아노 니쿠이 니쿠이 아메리까토 이기리스오.......(저 밉고 미운 미국과 영국을........)하는 말은 나오지 않고, 미국에 졌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단 위에서 내려갔다.

다케다 선생을 밀어낸 새 선생은 김재규 선생이었다. 그의 복장은 간편한 평상복이었지만 신은 일본항공대원의 군화로 연붉은색의 짧은 장화였다. 그는 안동농림학교에 다니다가 소년항공대로 강제 징집되어 비행 훈련을 받고 특공대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오자 부족한 교사를 구하지 못한 선산국민학교에서 그를 복학도 못하게 하고 교사로 초빙하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근무를 시작하던 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아직도 일본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일본에 충성하던 교사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전교 조회를 했다. 일명 애국조회였는데 선생님들은 돌아가며 독립운동가, 애국선열에 대한 위인들을 한 분씩 소개하며 그 업적을 소상히 설명했다. 조선의 역사나 독립운동사에는 깜깜했던 우리에게는 단비와 같은 뜻있는 시간이었고, 무척 재미가 있었다.

당연히 이승만 박사가 처음 시간에 소개되었고 김구, 김일성, 여운영, 이준, 윤봉길, 안중근 의사와 열사가 매일 한 분씩 소개되었다.

김재규 선생이 훈화할 차례가 된 날이다. 그는 단 위에 올라가더니 큰 소리로 아주 짧게 훈화를 하고 내려갔다.

"조선 사람은 머리가 깨어졌을 때 된장 바르면 낫지만 일본 놈 대가리가 깨어졌을 때 된장 바르면 곰팡이가 피어 죽는다."

우리는 웃음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 짧은 훈화는 학교 안에서 오랫동안 화재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일본 사람에게 큰 원한을 품었기에 그런 말을 했겠는가. 또 우리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우스개 같은 이야기로 강조했던 것이다.

그가 다니던 안동농림학교에서는 일제 말기에 반일 폭동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이 되어 많은 학생이 감옥으로 가고, 김재규 선생의 담임인 유시승 선생도 감옥에 들어가서 전염병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다. 그를 치료하던 의사는 그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학교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해서인지 비록 강제로 일본군에 징집은 되었지만 반일 감정은 뼈에 사무쳤던 같다.

김재규 선생은 학교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 국방경비대 장교로 입대했다.

학교에서는 많은 생활 용어를 바꾸고 교칙도 얼마 있지 않아 바꾸었지만 일본의 잔재가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국민학교라는 이름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학년, 학기, 과목도 그대로였다. 일본 국가가 없어지고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는 지금과 같았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석별의 정'이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곡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그것은 독립 운동을 할 때 고난과 애환이 곡 속에 스며들어 그런 것으로 알았다.

조국은 찾았지만 생활 형편은 일제 말기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우리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호롱불을 켜고 지내는데 석유마저 넉넉지 못해 불도 없이 일찍 자거나 밖에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가 밤늦게 들어와 자기도 했다.

연봉리에는 대서소를 경영하는 심 대서사가 살고 있었다. 그 아들이 우리 반에 있는 심종섭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전등도 없고 책상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심 대서사는 자기 집 앞에 살평상을 내 놓고 그 위에 긴 줄을 달아 밝고 큰 전등을 켜 놓았다. 밤이면 우리는 그 마루에 모여 앉아 숙제도 하고 제 공부도 했다. 밝은 불빛 아래 동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인데 가끔 심 대서사가 우리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번은 이 연봉리의 유래에 대해서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사육신의 한 분인 단계 하위지 선생은 태종 12년 선산면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집현전 학자로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고발로 사육신 모두가 삼족멸문의 화를 당했다. 단계도 그때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선생이 탄생할 때 집 앞 개울물이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다 하여 뒷골 개울을 단계천이라 하고 선생의 호도 단계(丹溪)라 했다.

또 한 분은 영남 사림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 김숙자 선생의 5남으로 세종 13년에 역시 이곳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세조 원년 아버지가 밀양으로 이거한 후 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선산부사를 거쳐 한성 부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이르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사림의 종조가 되었다. 그 후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사초에 올린 조의제문이 화근이 되어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다.

심 대서사는 역사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당부 말씀도 해주셨다.

"너희들은 이제 해방이 되어 우리나라 땅에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가난하여 전기불도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단계 선생이나 점필재 선생과 같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이 함께 앉아 공부하고 있는 바로 이곳, 연봉리는 유서 깊은 곳이고, 이곳에서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어느 날, 심 대서사는 마음먹고 우리에게 우리 고장의 자랑을 깊이 있게 가르쳐 주었다. 아예 종이에다가 적어 와서 천천히 강조할 곳은 강조하고 두 번 이야기 할 곳은 두 번씩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선산은 예로부터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셨다. 야은 길재 선생, 백암 농암 형제분, 생육신 이맹전, 단계 하위지 선생, 김숙자 선생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정신당 선생 등 훌륭한 분이 수없이 많이 나오셔서 이중환 선생이 쓴 택리지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더욱 힘을 주어 강조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랑스런 선산인으로서 야은의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절의를 거울 삼아 조국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 알았지?"

가을이 들면서 날씨가 쌀쌀해지니 밖에 내놓은 살평상 위에서는 공부를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초등학고 시절을 통틀어 이때만큼 재미있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다. 공부에 더 성의가 있고 머리가 좋은 아이들 몇이는 그 집 안마루에서 공부를 계속했지만 오래가지를 못했다. 심 대서사가 어디론가 떠났기 때문이다.

해방 후 사회는 혼란했다. 무법천지가 되었다. 우선 그동안 설움을 받았던 분풀이가 먼저 시작되었다. 군 병사계 일을 보던 심상호 부잣집 아들은 일찌감치 도망을 가고 없었다. 심상호 집 안채 마당에 모인 동네 사람들이 소리소리 질렀다.

"징용으로 간 내 아들 내놔라!"

"보국대 끌려간 내 남편 내놔라!"

"심 주사! 이 자석 나온나! 어데 갔노? 때려죽일 끼다."

그동안 억울했던 일들을 되새기며 소리를 질러 분풀이를 했다. 그래도 순박하고 어리석은 동민들은 집에다 불을 지르거나 가재도구를 부수지는 않았다.

일본서 가장 먼저 귀국한 사람은 태산이 삼촌이었다. 결혼한 여자도 데리고 왔다. 깨끗한 옷을 입고 가방도 들고 왔다. 우리는 그것이 큰 구경거리가 되어 그들을 따라 태산이 집으로 갔다. 우리가 밤마다 마실가는 장소가 되어 집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태산이 삼촌은 우리가 놀던 방에 짐을 풀었으나 들고 온 짐이라곤 큰 가방 하나뿐이었다.

같이 온 여자, 태산에게는 숙모가 되는 그 여인이 아랫배를 움켜쥐고 남편에게 일본말로 급하게 묻는다.

"변소가 어디 있어요?"

삼촌은 손가락으로 담 밑에 있는 통시를 가리켰다. 통시는 낮은 흙담을 사방으로 둘려 세웠으나 앞문도 지붕도 없다. 통나무 몇 개를 걸쳐 놓은 그 밑에는 똥물이 그득하여 혹시 미끄러져 빠질까봐 몹시 조심스러웠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 여인은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울상을 한다.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그때 우리 농촌의 변소는 다 그랬다. 우선 거름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구정물이나 쇠지랑물을 갖다 부어 똥물이 그득했다. 볼일을 보면 더러운 물이 튀어 오르는 것이 예사였다. 화장지가 없으니 통시 앞에 쌓아 놓은 짚을 몇 자락 뭉쳐서 뒤를 닦으니 항문이 상해서 치질을 많이 앓았다.

그 여인은 우리 농촌에서는 볼 수 없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복장도 일본 기모노를 그대로 입고 와서 깨끗하고 산듯했다. 미처 조선옷을 일본에서 구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뒤에 알았지만 태산이 삼촌은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사탕 하나도 가져오지 못한 빈 털털이였다.

여인은 그날부터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그 고운 손으로 매일 들에 나가 남의 밭이라도 매어주어야 쌀 한 톨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먼 곳 동네 우물을 머리에 이고 와야 하는데 물동이 이는 것이 서툴러 몇 번 넘어지고 물동이를 깨기도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아이가 들어섰는데 먹는 것이 허술하고 산후 조리를 제대로 못하니 몸은 퉁퉁 붓고 하혈은 그치지 않았다. 젖은 부족하고 미음마저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얼마 후 그 아이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슬프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일본과 만주에서 많은 청년들이 되돌아 왔으나 할 일이라곤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과 남의 농사일을 거드는 것 밖에 없었다. 자기 땅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 소작이었는데 그 땅마저도 한 떼기 부치려면 배경이 있어야 하고, 무엇이나 갖다 바쳐야 했다.

산에 나무도 워낙 베어재끼니 나무가 없어 산길을 십 리 이십 리 걸어서 깊이 들어가야 했다. 나도 산을 오르내리는 데는 익숙해져 멀리 가는 것이 조금도 힘들거나 겁나지 않았다. 다만 배가 고파 점심때까지 집으로 내려오지 못 하는 것이 힘들었다. 우리는 소나무 새순을 잡아당겨 그 단물을 빨아먹기도 하고, 소나무 속껍질 송구를 벗겨 질근 질근 씹기도 했다. 제일 맛있는 것은 칡덩굴 뿌리를 캐어 그 속을 뜯어먹는 것이었다. 무척 달고 허기도 면할 수 있어 좋았다.

일제 말기 군용 기름을 짜기 위해 솔 괭이를 만드느라 소나무를 거의 베었으니 남은 것은 나무를 벤 밑동뿐이었다. 마지막에는 나무뿌리를 캐내기까지 해야만 했다 그것을 고두뱅이라 했는데 큰 나무 뿌리 하나를 캐면 하루 일거리가 되었다. 나는 여러 번 고두뱅이를 캐러 괭이를 들고 산에 갔었다. 하나만 캐 와도 밑뿌리가 워낙 커서 며칠을 땔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

식구는 불어나는데 먹을 것은 없고, 위생관리는 허술하고, 예방주사나 소독이라고는 눈 닦고 봐도 없으니 자연히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호열자, 콜레라였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정식 장례를 치르거나, 병원에서 마지막 치료라도 해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였다. 선산면에는 병원이라곤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어린애 홍진 하나 고칠 수 없는 아주 영세한 병원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어찌 호열자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죽은 시체는 감천강으로 흐르는 대리방천 둑 밑에 가져다 쌓아 놓고, 화장을 했다.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냄새가 났다. 우리는 그것도 구경이라고 철없이 그곳에 가서 온갖 것을 다 살펴보곤 했다. 누구 하나 전염병에 대한 주의 사항을 일러 주지도 않고, 금지 구역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 했다. 우리는 밥만 먹으면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다 찾아가 봤다. 구경거리라곤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 겁은 내었지만 그 죽음을 막아낼 궁리는 하지 않았다. 다 운명으로, 팔자소관으로 여겼다. 나는 죽을 팔자가 아니었던지 초등학교 6년이 될 때까지 병원이라곤 가보지 못했다. 농촌에는 돈이 없으니 병원에는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 거쳐 가는 홍진 같은 것을 무사히 겪어냈는데 딱 하나 천연두 예방으로 우두 맞은 흔적이 왼쪽 팔위에 남아 있다.

동무들은 이름도 모르는 역병으로 많이 죽었다. 나도 수없이 앓아누워 학교 개근상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아파 누웠으면 하늘이 빙빙 돌아가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 팔자는 좋았던지 그 질곡을 헤쳐 나가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런 와중에 동네 곳곳에는 농민들에게 가장 관심을 끄는 구호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토지 개혁

무상 분배

지주들의 토지 몰수

땅 한 평 없는 농민들, 지주들에게 과도한 소작료를 바쳐야 하는 농민들, 그마저도 땅을 얻지 못하여 지주에게 뇌물이나 딸아이까지 바쳐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공산당에 대한 환상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모임과 운동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우리집 뒷마당 대추나무 밑에는 십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노래도 불렀는데 모두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한사람은 연신 큰 마당 쪽을 내다보며 사람들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들 곁에 가서 엿듣기도 했으나 워낙 어리다고 봐서인지 별 제재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열심히 들었다. 그들 안에는 둘째 작은아버지도 함께하고 있었다.

민중의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감싸고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나는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꽉 박혀 혼자 계속 그 가사를 반복해서 읊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더니 하루는 작은아버지가 숙모에게 무어라 당부를 하고는 급히 처가가 있는 도개면으로 가서 숨었다. 이튿날 구미경찰서 형사가 찾아왔지만 숙모는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들리는 말로는 경찰서에 붙들려 가면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똥과 오줌을 줄줄 쌌다고 했다. 나는 그 연유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지만 무척 겁이 났다.

학교 선생님들은 우익과 좌익으로 나누어져 아침 조회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해댔다. 우리 동네 상급생들이 설명을 해주어 조금 이해가 되었지만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곳곳에 폭동이 일어나고,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지던 어느 날, 우리 동네 맞은 편 큰 길 위에서 이쪽 이문동을 향해 미군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질겁하여 집으로 달아났다. 총알이 우리 동네에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 위협사격인 것 같았다. 이때 선산에서 가장 공산당에 앞장서서 무슨 위원장인가 하던 양팔암 씨가 급히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이름은 너무 유명해서 어린 우리들까지 다 알고 있었고, 콧수염을 한 그의 모습은 위대한 혁명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왜 그가 도망을 가야하고 그것이 왜 큰 소문이 되었는지는 잘 몰라도 미군들까지 선산에 와서 총을 쏘았던 걸 보면 큰 일이 벌어졌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격동기를 겪으며 내 생활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학교만 갔다 오면 바로 소 먹이러 가야 하고, 소가 들에서 일을 할 때는 꼴을 뜯어야 했다. 땔감은 언제나 부족하니 틈만 나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했다. 언제나 배가 고프고 산이나 들에서는 목이 말랐다. 한전에서 전기를 넣어주지 않으니 철사로 전깃줄을 연결하여 집으로 전기를 끌어들였으나 전압이 맞지 않은지 이내 백열등이 터져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도 한전 직원이 나와 이내 철사줄을 거두어 갔다.

해방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조선말을 배우고, 애국가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는 것 외는 아무 것도 보태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과 사람들의 마음은 많이 달라졌다. 천지에 겁나는 것도 없고, 무엇이나 내가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고향을 등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여름 방학 때 안동에 계시는 아버지가 내려오셨다. 할아버지께 감히 입도 떼지 못하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나를 데려가야겠다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 이제 영아를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안동에 사범학교가 새로 생겼는데 거기에 영아를 입학시켜야 합니다. 올 겨울에 입학시험을 본다고 하니 지금 데려가도 늦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당돌한 말과 그 태도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10년 동안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큰아들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기가 막혀 입을 떼지 못했다.

"경상북도에는 하나 밖에 없는 사범학교가 되어서 입학시험이 무척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선산국민학교에 가서 전학 서류를 떼고, 내일 당장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재떨이에다가 긴 장죽을 힘껏 두드렸다.

"탕,탕,탕!"

이튿날 나는 꼭 10년 만에 정든 고향을 떠나 부모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책보자기를 들고 떠나는 나를 끌어안고 할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할아버지는 큰 기침을 하면서 먼 하늘만 쳐다보고 계신다. 숙모님도 부엌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책보자기에 머리를 묻고 훌쩍거렸다.

연봉리를 지나면서 외할머니 댁에 들렸다. 외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놓아주질 않는다. 나는 또 울었다. 연봉리 방천 다리를 느린 걸음으로 오르면서 이문동 쪽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10년 동안 겪은 잔인한 시대의 아픈 이바구들이 쏜살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연봉리 방천 다리를 힘없이 건너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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