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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헨젤과 그레텔

문차숙
문차숙

막내가 수련회 가고 없는 집 안은 찬바람만 휑하니 돌아 절간 같다. 아침마다 깨우느라 진기를 다 빼는 그가 집을 비운 아침, 나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같이 멍한 채 거실을 서성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두리번거린다.

막내를 보고 남들은 늦둥이라 한다. 내가 그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서른 후반이었으니 늦은 편에 속했다. 나는 직장에 다니며 아이 셋을 돌보기에는 몸이 허약한 탓에 막내를 큰댁에 맡겼다가 주말이면 데려오곤 했다. 아이는 주말마다 낯선 제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일이 제 딴에는 스트레스였을 거다.

막내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형과 누나가 있는 우리 집으로 왔다. 처음에는 바뀐 환경에서 많은 것을 낯설어했지만 옛 어른들 말씀대로 핏줄은 당기는지 빠르게 적응했다. 요즘 제 말대로 그때부터 고난의 시대가 열렸는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일어나 눈곱만 떨고는 유치원에 가서 근무(?)하고 오후에는 태권도학원, 미술학원으로 다니다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내가 퇴근할 때쯤이면 아이는 파김치가 되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막내의 초등학교 입학 준비에 들떠 있던 때, 큰아이가 심각하게 얘기했다. 막내가 중학생인 형에게 "엄마가 계모인 것 같다"며 친엄마가 맞는지 물었단다. 배 아파 낳은 내 아이가 나를 제 엄마가 아니라니. 가슴이 찢어졌다. 막내가 계모라고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막내는 글을 깨치고 동화책을 읽으면서부터 동화 속 주인공이 자기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잠에서 덜 깬 아이를 밥도 먹이지 않은 채 우유와 빵을 가방에 넣어 반강제로 유치원 문 앞에 버리다시피 내려놓고 붕 떠났다가 수시로 제가 잘 때 들어오는 '엄마'라는 사람이었다. 동화 속 계모와 다름없었다. 언젠가 그 엄마는 유치원이 아니라 숲 속에 저를 버릴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막내에게 배 속 태아 사진과 아기 때 사진 등을 보여주며 내가 제 엄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렇지만 상처 난 아이의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인 것 같아 한 달 후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막내는 내 키를 훌쩍 넘었고 계모라던 내게 학교생활의 모든 스트레스, 짜증을 풀어낸다. 내가 저 멀리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키웠다고 아무리 말해도 나를 꼭 닮은 아들이라고 우긴다. 가끔 자기 때문에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뒀다고 하소연하면 앞으로 몇 배로 보상해 주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나는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책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반듯한 막내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성적은 우수하지 않지만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하며 바르게 자라는 막내가 자랑스럽다. '헨젤과 그레텔'이야말로 나와 막내의 사랑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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