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55) 화가에게 전업 작가는 사치였다. 스스로를 '잔업 작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무명화가로 남루하게 살았고 결핍을 채우는 일은 부인의 몫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은 그에게도 유효했다. 2012년 혜민 스님, 출판사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스님 책의 삽화를 맡으면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도 일약 인기 화가 반열에 올랐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울 화단에서도 전시 기회가 잡혔고 이런저런 출판, 전시 문의 전화통이 울리기 시작했다.
스님과의 인연은 지갑만 불려 놓은 게 아니었다. 단 한 번 공동 작업은 인생에서도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스님이 뿌린 나눔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싹을 틔웠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남루함을 면했을 뿐인데 그의 생각은 벌써 베푸는 일에 미치고 있었다. 수입의 절반 정도를 공익사업, 재능기부에 쓰고 있다. "제가 받은 행운을 이제 '선(善)순환' 시켜야죠." 착한 붓으로 세상을 맑게 채색하고 있는 이 화백을 남산동 작업실에서 만나보았다.
◆사생대회 입상으로 화구 장만
유년 시절 기억의 조각은 아침 조회와 닿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조회에 대한 기억은 지루한 훈화와 시상식이다. 학생 이영철은 시상대를 마르고 닳도록 오르내렸다. "사실 전 그림보다 글쓰기 재능이 일찍 트였어요. 글쓰기 대회에서 대상은 많이 받았는데 그림 쪽에서는 입선, 입상이 더 많아요."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문예와 그림. 이 소질은 이 화백의 '이상한 능력'과 연결이 된다. 무언가 대상을 떠올리면 이미지가 너무 선명히 눈앞에 나타나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호국' 주제를 떠올리면 전쟁 영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그걸 글로 옮기면 글짓기가 되고 붓으로 옮기면 그림이 되니까 그에게 그림과 글짓기는 정말 쉬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천부의 재능을 키워내기엔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했다. 아버지는 대놓고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어머니가 몰래 사 나르는 물감만이 그가 그림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사생대회는 그의 존재를 알리는 무대인 동시에 화구(畵具)를 장만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교통비와 경비는 학교에서 해결해 주었지만 문제는 물감이었다. 그의 화구에 물감은 텅텅 비어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물감이 떨어졌을 때는 친구 그림을 먼저 그려주고 물감을 받아서 남는 시간에 작품을 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애교스러운 반칙'이었다. 그렇게 그의 유년의 꿈은 익어갔다.
◆아! 꿈의 무대 수성아트피아전
화가 초년에 그의 삶은 궁핍했다. 제대로 된 봉투 하나 집에 건네 준 기억이 없다. 아이들 교육비며 살림살이는 모두 부인의 몫이었다. 그러던 2012년 무렵 그는 수성아트피아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동화처럼 순수하고 수채화처럼 맑은 화풍을 눈여겨본 전시관에서 개인전을 제안한 것이다.
지역작가들에게 전폭적인 전시 지원을 해주는 수성아트피아전은 그에게도 꿈의 무대였다. 서둘러 개인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은 행운만 예비해 둔 게 아니었다. 그 무렵 자신을 있게 한 자양(慈養)이자 모태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릴 적 나물을 뜯어 팔아 화첩을 사다 준 어머니였기에 슬픔은 더 컸다. "울다 지치면 그림 그리고, 혼미해 있다 정신이 돌아오면 붓을 잡고 그러기를 6개월쯤 한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무념의 단계가 오더군요. 어머니가 몰래 슬픔을 거두어 가신 것 같아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딛고 수성아트피아 개인전은 그렇게 열렸다. 전시회는 순탄했다. 전 작품이 큰 사랑을 받고 언론사 인터뷰도 줄을 이었다. 새로운 화풍을 대하는 지역의 반응도 괜찮았다. 특히 전시회를 참관한 관객들이 블로그나 카페, SNS에 감상평을 올리고 퍼 나르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어갔다.
◆혜민 스님 책 삽화로 스타화가 반열에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삽화작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 무렵 수성아트피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블로그에 올린 작품들이 인터넷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출판사와 스님의 눈에 포착되었다. 화풍에 반한 스님은 즉시 공동 작업을 제안했고 계약은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솔직히 처음에 계약서 사인을 할 때 찜찜했어요. 이미 전판(前版)에서 100만 부를 팔아치웠기 때문에 더 이상 흥행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책은 예상을 뒤엎고 300만 부 넘게 팔리는 기적을 연출했다. 혜민 스님도 '보통의 삽화는 글 이해를 돕는 보충용이지만 이 화백의 그림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완성된 의미를 갖는다'며 평가했다. 스님의 선의(善意)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감사를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서울 개인전을 주선해준 것이다. 전시회 비용은 스님이 그만큼 그림을 사주면서 해결이 되었다. 스님은 바쁜 중에 일부러 전시회장을 찾아왔다. 격려사를 아끼지 않았고 노래를 세 곡이나 부르면서 행사를 빛내주었다. 덕분에 서울전시회는 또 한 번 완판 행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전시회 이후 이 화백은 서울 큐레이터들의 주목 대상이 되었고 또 여러 합동전시회에서도 화가들의 러브콜이 줄을 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행운이라기보다 초심을 잃지 않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해온 데 대한 보상이었다. 이 화백은 스님과 인연 이후 물질적으로 조금 풍요해지고 유명세도 얻었다. 그러나 더 큰 교훈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고 재능을 사회에 펼쳐 놓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지금 그는 수입의 40%를 나눔 활동이나 기부에 쓰고 있다. 벌써 몇몇 공공기관에 상당수의 그림을 쾌척했다.
"제 그림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곳이 있다면 기꺼이 재능을 기부할 것입니다. 관공서나 복지단체 출판, 인쇄과정에서 제 그림이 필요하면 기꺼이 이미지를 무료로 드릴 생각입니다."
자고 나면 우울하고 깜짝 놀라는 뉴스만 나오는 요즘, 이 화백의 사랑의 캔버스가 사회를 환하게 비추길 기대해본다.
◇이영철 화백 작업의 모티브는? "서랍에 갇혀 있는 동심 종이배·봄꽃·달로 풀어 놓았죠"
이 화백의 그림엔 종이배, 봄꽃, 남녀, 달이 단골로 등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근원을 DNA 배열에서 찾듯 이 화백의 모든 상상력은 이 소재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큐레이터들은 말한다. 이 화백에게서 그림 작업의 모티브를 들어 보았다.
-이 소재들의 의미는.
▶제 그림의 주제는 동심 회복입니다. 원래 이것들은 어릴 적 우리 맘속에 있던 것들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것들이죠. 각자 기억의 서랍에 갇혀있는 동심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종이배는 어떤 의미.
▶옛날 종이배는 동심을, 연서(戀書)를 실어 나르던 메신저였습니다. 부호화되어 기계음만 전하는 디지털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종이배를 통해 옛날에 손 편지로 마음을 이어주던 아날로그 통신 방법을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항상 보름달이 등장하는데.
▶달은 본래 둥근 것이고 우리 맘도 둥급니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반달이나 그믐달이 되는 것뿐이죠. 왜곡된 달의 본성을 바로잡고 본래 둥근 성질을 회복해주고 싶어요.
-화풍엔 봄만 있나.
▶봄은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잉태시킨 생명의 계절입니다. 우리가 1년을 놓고 볼 때 비도 오고 눈보라 치는 날도 많지만 맑고 갠 날이 훨씬 더 많아요. 비, 구름 같은 부정적 정서보다 밝음, 긍정을 보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봄이라는 계절로 형상화하고 있어요.
-그림 속의 남녀는?
▶누구나 한번 쯤 지나가는 동화 같은 시기의 첫사랑 남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우리는 유일하게 '계산 없는 사랑'을 합니다. 모든 커플은 가장 순수한 사랑 시기의 남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그림 속의 사람들은 아주 작습니다. 사람도 나무나 풀처럼 자연의 일부이고 실제로 자연 속에 서면 아주 작습니다. 다만 그 속에 우주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으니 그 어느 자연보다도 크다는 뜻도 담았구요.
이 화백의 그림과 동화 같은 시는 최근 펴낸 '사랑이 온다'(해조음 출판)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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