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20·끝>아픈 역사 간직한 남구 이천동 근대골목

일제강점기 일본군 80연대…지금은 미군 캠프 헨리 주둔지

일제강점기 때 대구의 주요 시장 상권을 손에 쥐었던 일본인 거상 마치다 별장.
일제강점기 때 대구의 주요 시장 상권을 손에 쥐었던 일본인 거상 마치다 별장.
대봉배수지 1호기
대봉배수지 1호기
뒤로 보이는 서봉사와 그 앞 명소 사찰 카페
뒤로 보이는 서봉사와 그 앞 명소 사찰 카페 '다정'.
대구 남구 이천동 바로 옆 중구 대봉동 건들바위.
대구 남구 이천동 바로 옆 중구 대봉동 건들바위.

대구 남구 이천동은 중구의 근대골목만큼 대구가 지나온 근대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는 동네다. 지난 세기 대구에서 펼쳐진 서양음악 보급사의 한 페이지가 조명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 물산업 중심도시를 꿈꾸는 대구에서 '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장소도 이천동에 있는데, 금호강이나 신천 같은 하천이 아닌 산에 있다. 이천동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주둔했던 거점이기도 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되돌아봐야 할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대구에 살았던 일본인 거상 마치다 별장

남구 이천동 마태산 언덕에는 '마치다 별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다. 그 이력을 살펴보면 이채롭다. 별장에 붙은 이름인 마치다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의 주요 시장 상권을 손에 쥐었던 일본인 거상이다. 마치다 별장은 정확히 말하면 일본과 유럽의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건축물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다른 적산가옥들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현재 이곳에는 김진혁(57) 화가가 살고 있다. 이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인 김 씨는 마치다 별장에 대해 "어릴 때에는 뜻도 모르고 별장의 일본어 발음인 '벳소'라고 불렀던 곳"이라고 했다. 인근에 살던 김 씨는 1970년대에 마치다 별장으로 이사를 왔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살면서 건물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그 덕분에 일본식 붉은 슬레이트 지붕, 회칠을 한 회벽, 도코노마(내부 바닥을 한층 높여 만든 상석), 벚꽃나무 기둥 등이 현재 그대로 있다.

김 씨가 이사를 오기 전 마치다 별장은 음악가 권태호(1903~1972)가 대구 음악교육의 산실로 조성하려고 힘쓴 곳이었다.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노랫말로 잘 알려진 '봄나들이'의 작곡가 권태호가 마치다 별장 자리에 대구음악학원을 세우려고 노력한 때는 1946년이다. 광복 직후였던 당시 대구의 음악 환경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권태호는 1927년 대구소학교 대강당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구에서 독창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대구에 서양음악을 보급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대구음악학원 설립도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아쉽게도 대구음악학원은 자금 문제 등의 이유로 결국 명맥이 이어지지 못했다.

음악 대신 마치다 별장은 곧 '대구의 고미술'을 주제로 하는 미술관으로 새로 태어난다. 김진혁 화가는 거주지를 인근으로, 그러니까 이천동 토박이인 까닭에 이천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앞서 '학강재 아트하우스'라고 이름 붙여 둔 마치다 별장 건물 안에 그동안 수집한 대구의 고미술 작품 1천여 점을 채워 넣을 계획이다. 마침 바로 옆에는 1960년대부터 형성됐고 현재 40여 곳의 문화재매매업소가 자리해 있는 '이천동 고미술거리'가 있어 이 미술관은 더욱 의미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

◆건들바위, 영선못, 대봉배수지, 수도산, 일본군 80연대…이천동 근대 스토리텔링

동쪽으로 신천과도 접해 있는 이천동은 대구에서 '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네다. 우선 동네 이름인 이천(梨川)이 '배나무샘'을 가리킨다. 주변에 배나무가 많았고 1년 내내 샘물이 마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샘인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천동 바로 옆 건들바위는 옛적 이천동에 큰 강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연물이다. 큰 강의 거듭된 범람이 현재 건들바위의 멋들어진 결을 만들어냈다. 가뭄을 면하기 위해 인공저수지를 조성한 역사도 이천동에 있다. 현재 영선시장 일대에는 영선못이 있었다.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성 당시 무려 12년 동안 못을 팠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영선못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주변 경치가 좋아 스케이트장과 낚시터로도 활용됐다. 그러다 영선못은 1930년대에 매립됐다. 매립지 위로 운동장이 들어섰고, 1980년대에는 미군 장교숙소가 지어졌다가 지금은 시장이 돼 있다.

건들바위는 치수가 제대로 되지 못해 방치돼 만들어진 자연조형물이다. 반면 영선못은 농경사회가 발전을 거듭하며 펼친 치수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 흐름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져 대구에 최초로 수돗물을 공급한 시설인 '대봉배수지'로 이어진다. 수도산 정상에 있는 대봉배수지 1호기(1918년 준공)와 2호기(1925년 준공)는 현재 근대건축물로 등록돼 있다. 1호기 건축물 윗부분 현판에는 日夕新(일석신, 밤낮으로 깨끗하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 시설을 일제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나 후대 상수도 관련 종사자들에게 울림이 큰 지침을 전한다. 대봉배수지 바로 옆에는 대구시상수도사업본부가 자리해 있을 정도로 이곳은 과거나 현재나 대구 상수도의 요지다.

이쯤에서 수도산 명칭의 연유도 드러난다. 수도산은 '수도' 시설인 대봉배수지가 들어서면서 나온 이름이다. 사실 더 오래된 명칭은 대구 앞산에서 자락이 이어지는 기린산 또는 삼봉산이다. 삼봉은 3마리의 봉황을 뜻한다. 기린이나 봉황이나 옛적부터 길하게 여겨진 상상 속 동물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곳이 대구에서 풍수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삼봉은 또 봉산, 봉덕, 대봉 등 이천동 주변 3곳 동네에 이름을 주기도 했다. 풍수가 좋다고 하는 명당자리에는 불교 사찰이 먼저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다. 수도산 위에는 도심 속 비구니 절 '서봉사'가 있다. 1920년, 즉 근대에 창건된 절이다. 한글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가 다를 뿐인 수도(修道, 도를 닦음)의 의미와 통하는 공간이다.

대구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민중들을 막아선 것은 일제 경찰뿐만이 아니었다. 황토색 군복을 입고 긴 총을 든 군인들도 있었다. 일본군 80연대였다. 그 주둔지가 바로 현재 이천동 미군부대 캠프 헨리 자리에 있었다. 또 건들바위네거리 북서편에는 일본군 육군 관사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이 일대에 가면 현재 주택으로 쓰이고 있는 적산가옥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천동 영선시장 바로 아래 대명동에는 일제가 전쟁 때 죽은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령탑이 있었다. 충령탑은 광복 첫돌을 맞은 1946년 8월 15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파됐다.

즉, 이천동은 대구 주둔 일본군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아픈 역사라서 오히려 더욱 소중하게 품고 또 되새기는 시대가 됐다. 대구의 경우 중구 동산동의 3'1만세운동길 등 일제강점기 저항의 현장과 함께, 남구 이천동의 일본군 주둔 흔적도 의미 있게 조명돼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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