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묘미는 뭘까? 예술성, 오락성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대리만족'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해 주거나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 줄 때 더욱 짜릿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베테랑'은 오래 기억되는 영화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재벌'(財閥)이라는 세습 자본주의가 활개치는 한국사회에서 일개 형사가 재벌 3세를 감옥에 보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 서민들은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권선징악은 한국사람의 가슴에 남아있는 좌우명과 다름없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서도철(황정민 분) 형사를 '21세기판 홍길동'이라고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재벌 가족들의 포악질은 실제 일어난 일이다. SK 3세의 맷값 사건,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재벌 3세들의 환각 마약 파티, 한진그룹 3세의 '땅콩 회항'까지 줄줄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재벌 가족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신분임에 틀림없다. 신하들에게 견제와 감시를 받던 조선시대 임금보다 더한 특권과 권력을 누리고 세습하는 현실이니, 서양의 봉건 영주보다 나으면 나았지, 전혀 못하지 않다.
한때 큰 논란을 부른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에도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건희 회장은 특이한 버릇이 있다. 회의를 아무리 오래 해도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그래서 회의가 있는 날 사장들은 아침부터 국이나 물을 포함한 일체의 수분을 섭취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회의 직전 임원들에게 기저귀를 나눠주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건희 회장의 집이 있는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에는 리움미술관, 이 회장 아들, 딸의 집이 몰려 있다. 경비원을 대거 배치해놓았는데(중략) 사실상 '그들만의 마을'에 일반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며칠 전 본부 직원들과 '베테랑' 관람을 하고 치맥을 먹으면서 영화평을 실컷 쏟아내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조간신문 1면을 보니 '롯데가 새로운 각오로 거듭나겠습니다'라는 문구로 대문짝만 한 광고가 실려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경영권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 형제간에 치고받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각오' '과감한 혁신'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낯 뜨겁고 양심에 찔려 쉽게 내뱉기 힘든 말이 아니던가. 진정성은 보이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가족 간에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롯데 경영권 분쟁의 와중에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재벌 개혁' 움직임이 강하게 일기도 했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느냐는 둥 조용하기 짝이 없다. '정권은 5년뿐이지만 재벌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재벌은 청와대와 정부, 국회, 사법부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서민경제는 아우성인데 재벌을 포함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이 700조원에 달하는 것을 보면 우리 경제구조가 얼마나 불균형적이고 비정상적인지 알 수 있다.
재벌 2, 3세의 포악질도 밉지만,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서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행태는 더더욱 미운 짓이다. 혹자는 재벌들에게 공공성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개혁은 인간을 계도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제도화, 법률화하는 것이 요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너무 거창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갈등이 있긴 하지만, 영화 속에서 조태호(유아인 분)가 말한 것처럼 '어이가 없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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