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칠레 출신으로 교수이자, 연극연출가 겸 포크 가수였다. 1932년에 태어나 1973년 41세로 죽었다. 그의 죽음은 끔찍했다. 하라는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1973년 9월 11일 동료 교사, 학생 등과 함께 학교에서 반대 집회를 벌이다 다음 날 군인에게 끌려갔다.
하라는 당시 반체제 인사에게는 최악의 감금 및 고문 장소였던 산티아고 체육관 지하실에 감금된 뒤 사흘 만인 9월 15일 산티아고 빈민가의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몸에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고문 흔적이 있었다. AP통신은 칠레 군인들이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면서 하라의 뒷머리에 총을 쐈고, 그가 죽자 다른 군인 5명이 44발의 총을 쏜 뒤 시신을 버렸다고 전했다.
하라는 미국의 우디 거스리나 피트 시거, 스코틀랜드의 이완 맥콜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저항 가수로 손꼽힌다. 피노체트 군부가 그를 죽여야 할 이유는 많았다. 하라는 칠레의 노래 운동패인 '누에바 칸시온 칠레나'(Nueva Cancion Chilena, 새로운 칠레의 노래)를 통해 민중의 삶과 고통을 노래하면서 사회 변혁을 꿈꿨다. 또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날 사망한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 아옌데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그가 사망하자 군부 독재 세력은 하라의 노래 테이프를 대부분 없앴으나 아내인 후안 하라가 일부를 빼돌려 오늘날 전 세계로 퍼졌다.
하라를 살해한 군인들에 대한 처벌 문제는 꾸준히 제기됐으나 여러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2012년 말 칠레 법원은 하라에게 직접 총을 쏜 페드로 누네즈를 비롯한 8명의 전직 군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면서 수사를 재개했다. 수년간의 수사 끝에 칠레 법원은 지난달, 하라의 살해에 관련된 10명에 대해 살인과 납치 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그가 살해당한 지 43년 만이다.
하라의 이름은 독재에 대한 저항이나 시민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러시아 우주과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크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빅토르 하라'라는 이름을 붙였고, 칠레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가수'라는 시를 헌정했다. 아버지 우디 거스리를 이어 저항 포크 가수의 길을 걸었던 알로 거스리는 '빅토르 하라'라는 곡의 노랫말을 이렇게 썼다. '칠레의 빅토르 하라/그는 유성 같은 삶을 살았다/그는 노래와 기타를 무기로/칠레 국민을 위해 싸웠다/그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어떤 것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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