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는 대구에 딸 가족이 왔다.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댁에 가자고 조르는 아이들 등쌀에 못 이겨 딸 가족은 거의 해마다 온다. 시원하고 재미있는 놀이시설이 있는 곳도 많을 텐데 찾아와 주는 그들이 고맙기 짝이 없다.
아내는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 칠성시장까지 가서 복숭아를 한 보따리 사 왔다. 수박은 너무 무겁다며 사지 않고 가까운 데서 사기로 했단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란 옛말 그대로 늘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 그래서 인사를 받자마자 얼른 복숭아를 씻어서 쟁반에 담아 내놓았다. 아이들은 얼른 복숭아 한 개씩을 잡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사위한테도 '한 개 먹어 보게' 하면서 장모가 권했다. 껍질을 벗긴 아이들이 한 입 베어 먹더니 인상이 이상해졌다. 맛이 영 아닌 모양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사위도 한입 베어 먹더니 역시 실망의 얼굴을 했다. 옆에서 그들 눈치를 챈 나는 얼른 복숭아 하나를 집어 껍질 한쪽만 벗긴 뒤 맛을 봤다. 영 아니었다. 단맛이라곤 전혀 없고 싱거운 무를 먹는 것보다도 못했다.
"이 복숭아 영 맛이 없네."
나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더니 아내는 얼른 나와서 내가 베어 먹던 복숭아를 집어 한 입 베어 먹다가 금세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내가 먹어보니 맛이 좋아서 샀는데… 흠은 조금 있어도 맛은 괜찮았는데…" 하면서 다른 복숭아 하나를 얼른 까서 먹어본다. 그것도 역시 그랬다.
아내는 먹던 복숭아를 모두 거두어 부엌으로 가져가고 대신 수박을 들고 와 잘랐다.
"얼른 이거나 먹도록 하자."
아내는 아이들한테도 미안한 일이지만 오랜만에 온 사위에게 대접하는 복숭아를 이렇게 맛없는 걸 사온 것에 대해 엄청 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옆에서 내가 봐도 영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수박을 먹으면서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인 두 외손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 엄마, 이모가 지금의 너희들만 할 때 우린 참 가난하게 살았다. 쌀밥도 먹을 수가 없어서 보리가 반쯤 섞인 혼합곡을 먹었지, 학교에 가서 먹는 도시락도 역시 그런 밥이었어. 그러니 과일은 더구나 제대로 사 먹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도 제철의 과일은 먹여야겠다 싶어 시장에서 아주 싼 과일을 사 왔지. 싼 과일이라도 흠이 좀 있을 뿐 맛은 괜찮았어. 그때 그 버릇이 할머니한테는 아직도 남아 있는 거란다."
아이들은 그냥 어리둥절한 채 눈만 끔벅이고 있다. 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 할머니가 사 오신 복숭아는 장사꾼한테 속은 것 같아. 옛날엔 맛을 보고 사오면 그 맛이 그대로였는데 요새는 그게 아닌가 봐. 할머니가 맛을 본 복숭아와 파는 복숭아는 아주 딴 것이었나 봐. 할머니는 너희들에게 맛있는 걸 먹이려고 이 더위 속에 먼 시장까지 갔었는데 그 보람도 없이 이렇게 맛이 없는 걸 사 왔으니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셔."
그제야 아이들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난 시작한 김에 이야기를 좀 더 했다.
"엄마와 이모가 어릴 땐 그런 거라도 먹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너희들만 할 땐 어떻게 살았을까?"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
"학교 앞 큰길 가에 참외 장수가 참외를 지게에 지고 와서 팔았어. 어른들이 와서 그 참외를 사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깎아 먹었지. 우린 그게 너무 먹고 싶어 구경만 했어. 그런데 용감한 아이가 있었어. 그 어른이 깎는 껍질을 먹는 거야. 껍질이 땅에 떨어지면 흙이 묻기 때문에 아이는 그 껍질을 미리 잡고 있다가 먹었어. 나도 그게 먹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러니 여름 내내 수박이나 참외 한 조각 먹어보지 못하고 넘겼지. 할머니가 오늘 사 오신 복숭아는 과일 가게 주인한테 속아서 산 거야. 그래서 할머니는 너희들한테 엄청 미안해하고 있단다."
그러자 아이들이 웃으며 부엌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친다. "예, 잘 알았습니다. 할머니!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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