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오피스

사무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스릴러의 무대로 펼쳐진다. '여고괴담'(1998) 이래 많은 호러영화가 학교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무한경쟁시대의 비인간성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88만원 세대, 이태백, 7포 세대라고 자조하는 20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 그리고 구조조정 대상자로 전락해 버린, 아직은 할 일이 많지만 무능력자로 낙인찍힌 사오정 세대가 함께 생활하는 사무실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현실의 벽은 높고, 바늘구멍같이 좁은 정규직 세계에 안착하기란 정말로 힘든 정글 같은 경쟁 세상에서 주변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이들의 박탈감이 영화에서 분노로 표출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시간을 쪼개고 쪼개 알바를 하고 부동산에 모든 것을 걸어보지만 생활은 점점 더 바닥으로 추락하는 젊은이의 현실을 판타지 코믹 호러로 표현했다면, '오피스'는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의 자조와 분노가 정통 호러 스릴러 형식에 담긴다. 올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되어 강렬한 긴장감과 미스터리를 가진 소름 돋는 스릴러로 평가받았다.

어느 날 한 가족의 가장이자 착실한 회사원인 김병국(배성우 분) 과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사라진다. 형사 종훈(박성웅)은 김 과장의 회사 동료들을 상대로 수사를 시작하지만 모두들 말을 아낀다. 특히 김 과장과 사이가 좋았다는 인턴사원 이미례(고아성)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다. 종훈은 김 과장이 사건 직후 회사로 들어온 CCTV 화면을 확보하지만, 그가 회사를 떠난 화면은 어디에도 없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김 과장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료들은 불안에 떠는 가운데, 이들에게 의문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영화는 지금 시대에 흔하게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서사에 촘촘하게 배치한다. 일가족을 살해한 가장, 죽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중견사원, 영업사원들을 닦달하다 못해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임원, 학자금 대출로 인해 빚으로 시작하는 사회생활이지만 정직원의 길을 멀기만 하고 선배들의 갖은 폭언을 들으며 회사 생활을 해야 하는 신입 인턴, 실적의 압박으로 인해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인 직원들. 한 사무실 안에는 온갖 군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스트레스와 분노로 가득하여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폭발하고 만다.

영화에는 우리 모두가 접해봤음 직한 캐릭터들, 경험해봤음 직한 해프닝으로 가득하여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허를 찌르거나 반전으로 오싹하게 하기보다는, 그럴듯하거나 예측 가능한 상황들이 펼쳐져 긴장감이 때때로 흐트러지기도 한다. '여고괴담'에서 귀신이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듯이 '오피스'의 범죄자는 사무실을 떠나지 못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대부분 생활을 함께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살인사건을 계기로 섬뜩하게 포착해 낸다. 게다가 회사의 명성 때문에 그리고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침묵하거나 거짓을 증언하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동료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기적이고 차가운 인성만 남는다. 형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무능력하다. 영화는 우리도 무표정한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지 하는 반성의 순간을 제공한다.

세밀하게 조직된 세트와 적절하게 감정을 유도하는 사운드, 연기파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 앙상블과 호러 장르의 규칙을 따르는 편집 기법으로 인해 영화는 현실감 있는 공포를 잘 살려낸다. 세상은 점점 더 포악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강퍅해지는 가운데 학교, 가정, 사무실로 확장된 집단 공포가 다음은 어느 공간을 호러의 무대로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일상공간이 주는 공포는 낯선 곳에서 발생하는 공포보다 훨씬 더 무섭다. 청춘은 아프고, 중년은 힘에 부치는 현실이 깊은 슬픔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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