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초록을 보며

이기철(1943~ )

돌자갈 마꽃 수세미들의 하늘은 아직 쓸쓸하다.

들판에는 몇 번을 지워졌다 피는 풀꽃

길들은 언제나 서성이면서 南으로 뻗어 있고

모래들 흩어지고 산들은 허리 잘려

그리움 많은 사람들의 봄도 강물에 조금씩 숨긴 맘 풀어 놓는다.

여기저기 추억의 얼룩처럼 돋는 풀잎 그러나

초록의 얼굴은 오래가지 않는다.

지상에는 대부분 지명(知命)한 것들

상처의 보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깊은 침묵 속으로

들새들 행방 감추며 길게 날고

산들은 이 봄에 엄청난 無知로도

도라지꽃을 피워 놓고 혼자 잠든다.

조그맣고 정결한 삶 하날 찾기 위해

우리는 또 몇 천리의 길을 걸어야 하나

金言과 망각의 고통스런 뒤섞임 뒤로

양심과 휴지조각과 두어 겹 부끄러움 숨겨 두고

흐려진 불빛 세워 잠든 마을 바라보면

千의 바람 끝에 실낱처럼 흩어지는

슬픔의 섬세한 얼굴이 보인다.

(전문. 『청산행(靑山行)』. 민음사. 1982)

가을날, 지난봄을 되돌아 보자. 마 꽃과 수세미 꽃도 이미 지고 지금 하늘은 넉넉한 푸른빛이지만, 지난봄 우리 젊은 날의 하늘은 쓸쓸했다. 풀꽃들은 힘겹게 피어났고 길은 서성이는 발을 이끌고 자꾸 어디론가 달려갔다. 막막한 그리움은 강물을 따라 흘렀고 미리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추억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상처들을 보석처럼 사랑했고 시간의 침묵 속에서도 긴 날갯짓으로 날았다. 우리는 무지했지만 그 무지함의 힘으로 홀로 보랏빛 꽃들을 피워 올렸고, 고통과 부끄러움은 우리 젊은 날의 얼굴이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슬픔으로 섬세하게 금이 간 얼굴은 흐릿한 불빛으로만 보였지만 아름다웠다.

가을이다. '조그마하지만 정결한 삶'을 찾기 위해 우리는 초록과 더불어 싸워왔지만 뒤 따라오는 봄이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같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상처가 보석이 되는 것은 우리 내면의 연마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포르투나)은 우리의 덕과 용기(비르투스)에 의해서 반드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자주 우리의 운명은 우리 바깥에서 우리의 덕과 용기를 초과하기 일쑤다. 지금의 봄이, 지금의 청춘들이 그렇다. '초록을 보며'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 시는 어떻게 다시 쓰여질까 궁금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슬픔의 섬세한 얼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섬세하지 못하면 "초록의 얼굴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