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봄을 꿈꾸는 필리핀, 리잘을 기다린다

1967년 포항 출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석
1967년 포항 출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중국 사회과학원 법학연구소 박사후과정

30년간 발전 정체된 '실패한 필리핀'

냉전시기 미국에 생존 기댄 습관 때문

조국 해방 위해 목숨 바친 리잘처럼

기득권층 설득할 젊은 지도자 나와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한국의 서울 동대문시장 같은 쇼핑몰 그린힐스센터가 있습니다. 의류와 보석은 물론이고 온갖 생활용품과 먹을거리들이 행인들을 유혹하는 곳입니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이 거대한 쇼핑몰에서 '실패한 국가 필리핀'을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가끔씩 이벤트가 열리면 경찰이 동원되고 교통통제를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해야 할 정도로 북적입니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필리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마닐라에 있는 또 다른 필리핀을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린힐스센터를 둘러싼 초현대식 빌딩을 지나 바로 옆 블록으로 가면 전혀 다른 모습의 필리핀이 있습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시멘트 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연기 자욱한 골목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마치 군집생활을 하는 개미처럼 바글거립니다. 카드놀이를 하는 무리, 목소리를 높여 설전을 벌이는 무리,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는 무리, 그 북새통에도 깔깔거리며 뛰는 맨발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장충체육관을 지어 주던 1970년대의 화려했던 필리핀은 흔적뿐입니다. 일부 초현대식으로 발전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30년 동안 시간이 정지된 것 같습니다. 낡은 건물, 움푹 파인 보행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표지판, 엿가락처럼 늘어진 전깃줄, 희뿌연 가로등이 도시의 몸체입니다. 공공적인 것은 거의 방치되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라는 차량을 보면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창문도 에어컨도 없습니다. 노선 표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행선지도 대충 수기로 적어 붙이고 다닙니다. 중고차를 개조해서 만든 때문인지 엔진이 낡아 증기기관처럼 매연을 뿜어댑니다. 운행시간 역시 정해진 스케줄이 없습니다. 교통체제나 사회질서도 엉망입니다. 교통신호등이 녹색에서 적색으로 바뀔 때 황색등의 깜빡임이 아주 짧기 때문에 바쁜 운전자들은 언제든지 교통위반으로 단속될 수 있습니다. 운이 나쁜 경우 경찰에 적발되어 단속되는데 그때는 운전면허증 대신 500페소 지폐를 돌돌 말아 쥐여주면 그만입니다.

모두가 주인이 없는 탓입니다. 주인인 국민들은 정작 자신이 주인인 줄 모르고, 주인을 대신하는 정치인은 개인 안위에만 급급합니다. 필리핀이 가진 조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수백 개의 소수민족이 7천 개가 넘는 섬에서 살고 있고, 사용하는 언어도, 종교도 제각각입니다. 말 그대로 다양성과 수준이 천차만별인 필리핀에서 동질성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도 자신과 가족, 그리고 좀 더 큰 범위에서 자기가 속한 소수민족이나 부족을 우선시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관하고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변명일 뿐입니다. 필리핀에도 리잘(Rizal)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필리핀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다가 식민제국에 의해 처형된 분입니다. 영국 유학을 한 최고 엘리트였던 그는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필리피노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지금 필리핀에는 그런 영웅이 필요합니다.

최근 필리핀은 일본의 디지털 방송 송출방식을 도입하여 방송체계를 고치고, 동양 최대의 카지노와 쇼핑센터들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소비를 부추겨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의도이지만 어불성설입니다. 정치 스스로가 최고의 소비국 중국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국 일본조차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자존심을 버리는 상황에 필리핀은 여전히 미국 외줄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원래 아시아의 해양레저, 유흥, 관광산업은 필리핀 몫이었습니다. 후에 태국, 인도네시아가 등장하고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가 가세하면서 손님이 없어진 것은 미국 손님이 떠나고 새 손님을 유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냉전시기 미국에 기대어 생존하던 시절의 향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리잘과 같은 젊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두루 경험한, 냉전적 편견에서 벗어나 기득권 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젊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필리피노의 열정을 모아 화려한 필리핀의 봄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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