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전승<戰勝>과 광복<光復>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기념식 참관은 한중 관계의 변화와 국제 정세의 무상함을 시사한다. 사실은 승전기념일 자체도 나라마다 일정과 상황이 다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을 전승기념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와 동구권 국가들은 그 다음 날인 5월 9일을 승전절로 기념한다. 시차(時差)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의 육성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났다. 남한은 '광복절'로, 북한은 '조국해방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 지난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미국의 '대일전승기념일'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은 그 다음 날이다. 2014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임위원회 표결을 통해 이날을 공휴일인 '전승절'(戰勝節)로 결정 공포했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항복문서 조인식은 이보다도 일주일 늦은 9일 오후 조선총독부에서 열렸다. 미 24군단 하지 중장과 마지막 조선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의 서명이 끝나자,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만약 이날 항복 조인식에 임시정부를 대표한 김구 선생이 참석했고,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게양되었더라면, 9월 9일이 대한민국의 '전승절'이 되었을 것이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에 김구 선생이 "올 것이 너무 빨리 왔다"며 땅을 치고 통탄을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듬해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이를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연합국에 발송했다. 그리고 중국군과 함께 동북아 지역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한 것은 물론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일은 미군과 연합해 특수부대의 훈련을 강화하고 비행단을 편성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 때문에 국내 작전을 펼쳐보지도 못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랜 세월 풍찬노숙하며 가열한 항일투쟁을 벌이고도 대외적으로 승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다. 비운은 내부적으로도 이어졌다. 해방 후 식민지배 청산에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나치 독일에 4년 남짓 점령당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 780여 명을 처형했고, 중국 국민당도 359명의 친일파를 사형시켰다. 그런데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은 한국에서 친일'반민족 행위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은 그렇게 전도된 역사를 웅변한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무장 독립투사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수도 경찰청 간부로 변신한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었다는 얘기 하나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한평생 살다 가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아베 총독이 이 땅을 떠나면서 남겼다는 말이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 여전한 남북의 대치 상황과 저급한 국내 정치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 후 70년이 지났고, 마지막 총독과 같은 이름의 아베 총리가 침략의 역사를 부인한 채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 싸워 쟁취한 '전승'은 아닐지라도, 남의 덕에 얻은 '광복'이나마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탓이다. 우리의 광복은 아직 미완성인 것이다. 아베 총독과 아베 총리의 언행이 망언과 망동이 되도록 하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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