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13>금오산이 낳은 항일 독립운동가 박희광

"조국의 배신자, 너를 처단한다"…임정 친일파 암살 특공대로 맹활약

1924년 7월 26일 자 독립신문. 사진 왼쪽이 박희광(예명인 박상만으로 보도)의 당시 모습.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 제공
1924년 7월 26일 자 독립신문. 사진 왼쪽이 박희광(예명인 박상만으로 보도)의 당시 모습.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 제공
대구시 두류공원 인물 동산에 있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과 통일 염원 태극 횃불 조각상은 1997년 8월 15일 제막됐다.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 제공
대구시 두류공원 인물 동산에 있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과 통일 염원 태극 횃불 조각상은 1997년 8월 15일 제막됐다.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 제공
구미 금오산 도립공원에 1984년 12월 28일 건립한 박희광 선생 동상. 경상북도 현충시설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조두진 기자
구미 금오산 도립공원에 1984년 12월 28일 건립한 박희광 선생 동상. 경상북도 현충시설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조두진 기자

항일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1901년 2월 15일∼1970년 1월 22일)은 선산군 봉곡(현 구미시 봉곡동 171번지)에서 태어났다. 1908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간 후 18세에 임시정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 제5중대에 입대해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주로 담당한 임무는 친일파 암살이었다.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국경 지대에 잠복하며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 개 군사단체가 함께 작전한 일본 관동군 진로 봉쇄작전에 참여했다. 청춘을 민족독립을 위해 바친 박희광 선생은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선고와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며, 두 차례의 감형을 거쳐 20년 만에 출소했다. 1968년 3'1절 때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을 받았다.

◆3인조 암살 특공대 활동

만주에서 독립 투쟁을 하던 대한 독립단체들은 친일파 혹은 일본 밀정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시달렸다. 이에 따라 상해 임시정부는 친일 세력과 일본 요인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1924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은 임시정부로부터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특명을 받고 암살 특공대가 되었다. 이들은 암살과 테러에 필요한 승마와 수영, 사격, 폭탄제조법, 독침,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고, 신분을 숨긴 채 대한통의부 암살전문요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7월 26일(토) 자 독립신문은 '삼장사(三壯士)의 용감(勇敢)'이라는 제목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김광추(金光秋) 김병현(金炳賢) 박상만(朴相萬'박희광의 예명) 삼장사(三壯士)가 백주(白晝)에 용감(勇敢)히 봉천신시가정정(奉天新市街錠町), 즉 왜경찰서접근(倭警察署接近)에 은복(隱伏)한 전 보민회 괴수(保民會魁首) 최정규(崔晶圭)의 가족을 토벌(討伐)했다.'

◆암살현장에 사형 선고문 남겨

독립신문에 보도가 나기 전인 1924년 6월 1일 박희광 선생은 윤영기 동지의 안내로 푸순 방면의 고등계 첩자며 악질 친일파로 이름 높던 정갑주와 그 가족을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뤼순 시내가 발칵 뒤집혔고, 친일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밖출입을 꺼렸고, 일본 경찰은 박희광을 비롯한 삼인조 암살단을 체포하기 위해 눈을 벌겋게 뜨고 설쳤다. 박희광 선생은 정갑주를 사살한 현장에 다음과 같은 사형 선고문을 남겼다.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그런가 하면 1924년 6월 7일에는 일진회 회원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행각으로 국권 침탈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거두 최정규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최정규가 미리 피신하는 바람에 그의 부하 허윤과 가족을 사살했다.

친일파 암살작전과 함께 박희광은 만주 지린성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과도 지속적인 교류를 펼쳤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이 주춤하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일본 경찰서와 관공서를 공격했던 대표적인 독립단체다.

◆대담하고 전광석화 같은 공격

당시 다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활동하는 여성 스파이가 있었다. 한국식 이름은 배정자, 일본식 이름은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 그녀는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를 일본 경찰에 넘겼다. 박희광 선생은 흑치마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 역시 부상을 입혔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박희광을 비롯한 삼인조 암살단은 일단 침투하면 하루에 몇 건씩 공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공격으로 일본 경찰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여백을 쳤다.

1924년 7월 22일에는 펑톈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고, 같은 날 저녁에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 금정관에 침입해 거액의 군자금을 탈취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 중국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광추 선생은 현장에서 순국했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체포 현장에서 압수한 권총 3자루, 실탄 160발, 폭탄 1개, 그리고 삼장사가 작성해서 암살 대상자들의 시신 위에 남기고 떠나던 사형 선고문 여러 장을 1924년 9월 1일 공개했다.

◆악랄한 고문, 그러나 밝혀낸 것 없어

3인조 암살 특공대는 1919년부터 1924년 체포 시점까지 일본 고관과 친일파 암살, 일본총영사관을 비롯한 일본 기관 기습으로 일본 군경에 이미 수배 중이었다.

일본 경찰은 박희광과 김병현을 고문하면서 갖은 악랄한 도구를 사용했다. 대나무를 얇게 깎아 손톱 아래로 쑤셔 넣는가 하면, 혹독한 매질과 물고문을 이어갔다. 혼절하면 물을 퍼붓고,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우리는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다."

일본 경찰은 잔악한 고문을 가했지만 이들로부터 배후를 밝히거나 조직의 내부 정보를 파낼 수는 없었다. 거사의 공범으로 함께 체포됐던 다른 조직원들이 풀려났을 정도였다.

박희광은 1924년 다롄지방법원에서 1심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7년 뤼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어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후 일본 천황(裕仁)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되어,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20년(1924년 7월~1943년 3월)간 복역한 뒤였다.

◆김구, 노고 치하하며 "대업에 힘써 달라"

박희광은 1943년 출옥 후, 다롄에서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 때문에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 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뒤 박희광은 백범 김구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구는 박희광의 노고를 치하하며, 대업을 위해 힘써 달라고 한 뒤 비서를 통해 위로금을 전달하고 정부 수립에 힘을 모아달라고 했다. 박희광은 한동안 김구와 그 측근들을 암살로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박희광은 44세 때 문화 류씨(柳氏)와 혼인했으며, 해방 이후 대구 내당동, 칠성, 교동, 선산군 구미, 원평동, 칠곡군 왜관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은 1968년 3월 1일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인정도 받지 못했던 박희광은 형무소에서 배운 재봉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쉬는 날이 많았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희광의 항일 활동이 초기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작전이 극비였기 때문이다. 당시 비밀작전이나 소규모 전투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은 함께 전투에 참여한 동료의 증언이 아니면 증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박희광 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독립투쟁인데, 무슨 포상이나 훈장을 바란단 말인가"라며 훈장 받기를 거부했다.

해방이 되고 23년이 지난 후,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그의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 1924년 9월 1일, 2일, 5일, 8일 자 등 기사가 확인되면서 그의 행적이 증명되었다. 1968년 삼일절 행사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국민장(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선생은 2년 후인 1970년 1월22일 71세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타계했다.

◆굶주린 이웃 ·고아 돌보다 정작 본인은 말년에 생활고

박희광 선생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한테서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 칠성동에서 짐수레, 손수레 10여 대를 구입해 배고프고 굶주린 이웃들과 6'25전쟁으로 발생한 고아들, 끼니를 굶고 있는 동포들에게 주었다. 수레를 가지고 국화빵(풀빵) 아이스크림(여름 과자) 등을 팔아서 먹고살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처자식을 돌보지 못해 말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희광 선생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가난하게 사는 경우는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역임(1925~6)했던 이상룡 선생 집안은 안동 당대 최고 명문가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다. 집안에 건국훈장을 포상받은 인물이 9명이 되나, 정작 그 후손들은 보육원에서 중학교에 다녀야 할 만큼 가난했다.

2006년 6월 말 국가 보훈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총 5천834명의 독립 유공자 유족 중 학력이 중졸 이하인 유족이 3천259명으로 전체의 55.9%에 달하며, 직업이 없는 유족이 3천784명(64.9%)인 반면, 봉급생활자는 804명(13.8%) 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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