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돼지 같은 여자

드센 어촌 처녀들의 '총각 쟁탈전'

#마구 들이대는 학창시절 절친 세 여자

#연애의 고정관념 깨는 신선함 돋보여

#여배우들의 '억척스러운 연기' 눈길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란 것이 있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스 벡델이 고안해낸 것으로, 다음 항목에 부합하는 영화를 골라내어 여성 영화 베스트를 선정하는 기준이다. 첫째, 영화 속 주요 캐릭터 중 최소 두 명의 여성은 나와야 한다. 둘째,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셋째, 남자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

이 테스트는 양성평등과 관련된 기준에 맞는 영화를 간편하게 고르는 방법이다. 매우 쉬워 보인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기준을 통과하는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에 놀라게 될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1991),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판타스틱 소녀백서'(2000),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한국영화로는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나 김혜수의 연기 변신이 놀라웠던 '차이나타운'(2015)이 생각난다.

'행복한 장의사'(1999), '바람 피기 좋은 날'(2007) 이후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은 장문일 감독의 '돼지 같은 여자'는 타이틀에 '여자'가 들어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자들의 영화다.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집안의 가장이 되어 열심히 돼지를 키우는 억척스러운 여자 재화(황정음), 적극적이고 막무가내인 성격으로 장어를 키우는 여자 유자(최여진), 줏대 없는 여자 미자(박진주)는 학창 시절 친구들이다. 이 세 명의 여자 사이에는 마을의 유일한 총각인 꽃미남 준섭(이종혁)이 있다. 갈치로 흥한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생선이 잘 잡히지 않아 젊은이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처녀 총각이라곤 세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뿐이다. 준섭의 마음은 굳센 생활력을 가진 재화에게로 향하지만, 물불 가리지 않는 과감한 유자가 준섭에게 마구 들이댄다. 이들의 삼각관계가 영화의 주요 갈등이다.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때때로 고요하고 근사한 풍경이 카메라에 담겨서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그러나 영화는 어촌의 떠들썩하고 부조리하게 흘러가는 해프닝들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막무가내이고 루머는 얼토당토않게 확산된다. 홍보 문구는 '어촌 로맨스'라는 장르를 내세우지만 로맨스보다는 코미디가 앞서고 영화 후반부로 가면 갑자기 치정극으로 돌변한다. 성격이 분명한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대조적으로 이야기 전개는 정돈되지 않은 채 흘러가서 산만하며, 편집 리듬과 연기 앙상블이 아쉽다.

다시 벡델 테스트로 돌아가 보자. '우리 동네에는 드센 여자가 많다'라는 소년의 독백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 '드셈'이 삶을 억척같이 살아내는 여성들의 분투기를 활력 넘치게 그려내는 데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의 '드셈'은 우유부단한 총각 준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에 소모된다. 여자들이 모여서 나눌 수 있는 대화란 누가 남자를 차지하고, 누가 남자를 양보해야 할지에 대한 것으로 좁혀져 있어 답답하다. 휑해진 어촌의 현재, 무능한 부모들을 대신하여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여자들의 역할, 돼지를 키우거나 장어를 키우는 전문적인 일, 낚시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 관한 구상 등등 참으로 할 일도 많고 할 말도 많을 텐데 말이다. 보기 드문 미모에 능력을 겸비한 어촌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한 남자의 아내 되기에 몰두하는 모습은 여성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는 역부족이다.

로맨스 영화들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젊은 선남선녀를 주인공으로 근사한 소품과 세련된 사운드를 양념 삼아 더 예쁘게, 더 우아하게 만들어지고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돼지 같은 여자'의 다른 캐릭터, 다른 배경의 이야기는 신선하다. 주류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다양함을 내세우는 시도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고정관념, 성별 역할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기존 억척녀 캐릭터를 확장하는 황정음의 연기와 시크한 도시녀 이미지를 뒤집는 최여진의 4차원 코믹 연기에 시선이 간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안소영의 나이 든 얼굴 역시 반갑다. 절반의 아쉬움, 절반의 반가움이 공존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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