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 박윤배 지음/ 시와 표현 펴냄
중견 시인 박윤배 씨가 다섯 번째 시집 '알약'을 출간했다.
시인은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수인(囚人)'이라고 말문을 연다. 수인들에 관한 이야기, 그래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알약'은 갇혀 있는 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 대한 위무의 수사(修辭)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수인인가.
시인은 '누군가와 맺혀 있는 사람, 그러니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신,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내가 수인이다. 월급쟁이든, 큰 회사의 사장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형제든 수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수인이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 어쩌지 못할 수인을 '자발적 수인'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을 얽어매는 관계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인생을 탕진하면서도 스스로를 거기에 가두기 때문이다. 스스로 갇힌 자에게는 맹목성이 있을 뿐, 타산이 끼어있지 않으며 희생과 쓸쓸함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즐거움'으로 오인하는 우직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시인 박윤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쓴맛이 좋다. 누구는 복수를 위해(와신상담), 누구는 치유를 위해(약의 쓴맛), 쓴맛을 가까이 했다지만 나는 그냥 이유 없이 쓴맛이 좋다."
시인은 또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일류가 되고 싶어 하지만 일류는 재미없다. 또한 자신이 삼류인지도 모른 채 삼류로 사는 것은 씁쓸하다. 2.5류가 가장 좋다. 일류로 살자면 놀기도 어렵지만 2.5류는 놀 수 있어서 좋다. 일류로 살면 찾아오는 손님이 드물지만, 2.5류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좋다. 그러니 일류가 될 생각일랑 하지 말고 2.5류가 되도록 분발해라."
시집 '알약'은 어쩌면 2.5류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든 삼류에 대한 찬사이자 위로인지도 모른다.
'쨍쨍한 햇살 속에서/ 수레를 끌거나/ 지루한 장맛비에도 쇠꼴 베어오시던/ 아버지 당신은/ 집에 포획된 것이다/ 질척이는 논둑길 중심 잡기로 걸어서/ 법 없이도 살다갔다 말하지만/ 배운 것 없음을 한탄하던/ 당신 노랫 자락 끝에는 늘/ 있었다,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 땀 젖은 옷가지 빨랫줄에 널며/ 당신 마당 어귀에 연못 팠다고 해도/ 첫 햇살과 만나는 토란잎에/ 물방울로 포획되었던 것이다/ 해뜨기 전 잠시 가져본 평화와/ 언뜻 스쳐 간 것이/ 이승 행복 전부였음을/ 좀 더 일찍 왜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략). -포획되다, 3- 중에서.
시인의 눈에 아버지의 삶은 삼류였던 모양이다. 시인은 삼류와 2.5류 사이에는 '해뜨기 전 잠시 가져 본 평화와 언뜻 스쳐 간 것이 이승 행복 전부였음을 아는지 여부에, 그 짧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줄 아는지 여부에 달렸다고 말한다. 늦가을은 어김없이 오고야 말 것이고, 그때가 오면 연잎 잎맥은 틀림없이 허물어질 것이니 말이다.
'손 전화기 속에 사는 여자가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기만 하면 쏜살같이 커피 배달해 오는 여자. 좀 식었군! 바쁜가 보지? 물을라치면 입으로 뎁혀 드릴까요? 농담하는 여자/ (중략) 뒤로 가는 운전은 못하지만 앞으로 가긴 잘해서 요즘은 물 좋은 남자 만나기에 바쁜 여자. 쨍쨍한 햇살에도 더 이상 그을릴 흰 살이 없어 양산을 버린 여자.' -양산여자- 중에서.
시인은 '마른 목젖 너머 미끄러져야 우리는/ 제대로 살았다 할 것이고/ (중략) 중독된 사랑이 뒷맛은 모두 쓰다'고 말한다. 마른 목젖 너머가 미끌미끌하도록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란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야성적 언어, 남성적 어조가 활달한 시집이다. 하늘과 땅의 접경에서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이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프고 또 아픈 일상일지니, 구름도 할미꽃도 바람도 여자도 시인도 이 땅에서 잠시 만나 뜨겁게 한 몸으로 어우러지며 일으키는 먼지(중략) 우리 일상을 아연 살맛나게, 사랑할 맛나게 돌려놓는 시집'이라고 평한다.
박윤배 시인은 198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고, 1996년 시와 시학 신인상, 2009년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137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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