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은 대한민국이 광복 10주년을 맞았고 한국전쟁 휴전을 맞은 지 2년이 지난 도약의 시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도약의 시기여야 했다. 정작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를 극복한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채 치유하기도 전에 독재의 길로 역행하고 있었다. 결국 1960년 국민의 힘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이 발생하기 5년 전, 대한민국 언론자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 하나 있다. 9'14 대구매일신문(당시 매일신문의 사명, 이하 매일신문으로 통칭한다) 테러 사건, 일명 '백주의 테러 사건'이다.
◆1955.9.13 사설 게재…부패 정권 학생 동원에 펜으로 일침
▶1955년 9월 10일 유엔 대표부 상임대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자유당 소속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날 대구의 중고생 수백 명이 임병직을 환영하기 위해 수업시간에 불려와 길거리에 도열했다. 대통령이나 외국 원수도 아닌 자국 대사급 공무원의 방문에 자유당 관계자들은 학생들을 동원해 아첨을 떤 것이었다. 당시 태평로에 있던 매일신문사 앞 길거리에도 아침밥도 못 먹고 온 학생들이 땡볕에 몇 시간이나 서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최석채 주필은 펜을 들었다.
13일 자 매일신문에 최석채 주필이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 실렸다. 임병직의 대구 방문을 비롯해 당시 '고급 행정 관리들이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1955.9.14 백주테러…괴한 수십명 난입해 매일신문사 시설 부숴
▶사설 게재 다음 날인 14일 오후 4시 25분쯤 매일신문사에 괴한들이 쳐들어왔다. 이들은 윤전기 등 시설을 부수고, 직원들을 구타한 뒤 달아났다. 불과 10여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랬다. 그날 건물 입구에 버스 한 대가 서더니 곤봉과 망치를 든 괴한 20명이 내렸다. 자유당 출범에 기여한 국민회 경북도본부 총무부차장, 자유당 경북도당부 감찰부장 등이 이끌고 온 무리였다. 이들은 매일신문사 인쇄공장을 침입해 우종구 연판부장의 얼굴에 파열상을 입히고 직원 8명에게 타박상을 입혔다. 또 신문인쇄기 2대, 인쇄용 연판 4매, 7마력 발동기 등을 파손하고, 신문 6천여 부까지 탈취해 달아났다.
이 사건은 단 한 건의 사설과 단 한 번의 테러로 설명할 수 없다. 앞서 매일신문은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논조를 꾸준히 펼쳐왔다. 2월 6~10일 4차례에 걸쳐 '야당 진출의 길을 틔워 후진국들이 흔히 걷는 독재화의 길을 막자'는 등의 내용으로 '한국의 정당정치' 논설을 게재했다. 2월 17일에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라는 제목의 사설을, 4월 19일에는 동아일보 정간해제 관련 사설을 게재하는 등 수차례 정권을 향해 날 선 논조를 드러냈다. 결국 정권은 최석채 주필의 사설을 빌미로 눈엣가시였던 매일신문에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1955.9.17 주필 구속…국보법 위반 혐의 씌워 탄압
▶백주의 테러 사건 발생 사흘 뒤인 9월 17일 최석채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최석채 주필의 사설이 북한괴뢰방송에 인용되는 등 문제를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이날 신상수 경북경찰청 사찰과장은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이틀 전 이러한 상황 전개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매일신문 사주이자 제7대 천주교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당시는 주교, 1962년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자 대주교로 서임됨)는 최석채 주필과 만났다. "양심에 맹세해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으시오?"라는 서정길 주교의 물음에 최석채 주필은 "하느님께 맹세해도 양심에 부끄럼이 없으며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매일신문은 테러를 당한 뒤 16일 자 신문부터 테러의 주체가 자유당 정권임을 계속 알렸고, 전국 여러 유력지에서 수십 건의 관련 기사를 게재하며 지지했다. 언론의 공세에 국회진상조사단까지 꾸려지자 9월 22일 자유당은 "테러사건은 자유당과 무관하다"고 발뺌했다. 또 10월 7일 국회 본회의에 조사보고서가 제출되자 자유당 최창섭 의원은 "애국심에 불타 테러를 한 청년들에게 훈장이라도 달아주고 싶다"고 발언해 또 한 번 파문을 일으켰다.
◆1955.12.6 무죄 언도…"언론사에 오점 찍는 죄인 되지 않았다"
▶10월 14일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최석채 주필은 풀려났다. 불구속 기소돼 이후 1년간 법정투쟁을 이어나갔다. 결국 12월 6일 법원은 최석채 주필에게 무죄를 언도했다. 다음 날 최석채 주필은 '한국민주언론사상에 오점을 찍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감명을 금할 수 없다'는 소회를 지면에 밝혔고, '보장된 언론자유의 선(線) 확정, 본사 최주필에 무죄 언도'라는 기사가 함께 게재됐다. 1956년 1월 27일 법원은 검사의 공소를 기각, 최석채 주필의 무죄를 확인했고, 1956년 5월 8일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최석채 주필의 무죄를 확정했다.
최 주필의 법정투쟁과 이에 따른 무죄 판결은 한국 언론사에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최 주필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한국 언론은 독재권력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 매일신문이 조선, 동아, 경향신문과 함께 마지막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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