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조선통신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1970년대 초반 일본의 고서점에서 발견한 두루마리 한 장이 계기가 됐다.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호기심과 동경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바라보는 생생한 모습이 담긴 것이었다. 임진왜란 등 전쟁을 겪은 불구대천 원수가 10년도 안 돼 우호적 문화교류를 하는 조선통신사를 보면서, 그 아버지는 메이지유신 이후 악연으로 얼룩진 한일 관계 회복의 모델로 삼고자 했다.
재일사학자 고 신기수(1931~2002) 씨. 그는 조선통신사 연구에 뛰어들어 관련 자료 110점을 수집했고 1979년 기록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제작했다. 그리고 재일교포 1세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생생히 증언한 '해방의 그날까지'라는 영화를 찍었다. 이 외에도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한국에서 아버지의 영화를 상영하고 그것의 의미를 알리려는 신이화(50) 씨. 영국에서 NHK BBC 방송사에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납품했던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5년 전 아예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말을 잘한다.
▶2010년 한국에 왔을 때는 거의 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화에 한국어 자막을 입히기 위해서는 한국어 공부가 필수였다. 아직도 어설프다. 번역기를 들고 다녀야 안심할 정도다.(웃음)
-아버지는 '역사'에 인생을 걸었고, 딸은 '아버지'에 삶을 걸었다.
▶아버지 일에 삶을 걸었다는 것은 과분한 표현이다. 한국에 오니 딸이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놀랍고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딸 아들이 무슨 상관인가?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평가한다면 몇 점 정도 줄 수 있는가.
▶50점 정도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연구를 한국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 당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됐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희망의 역사도 아픔의 역사도 모두 자료로 남기셨다. 이를 쉽게 알리기 위해 영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남기신 영화를 소개해 달라.
▶모두 5편이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재일한국인 1세의 발자취를 기록한 '해방의 그날까지'와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다. 해방의 그날까지는 6년간 일본 전역을 다니며 재일교포 1세의 자료와 증언들을 모은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한류(韓流) 모습을 기록한 영화다. 당신은 늘 일본에 있는 각종 한국 관련 자료를 재일교포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추억하자면.
▶우리 집에는 종종 밤늦은 시간에 손님들이 오시곤 했다. 술을 드시기 위한 것이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새로 구입한 '물건'을 보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버지는 좋은 자료가 있다면 집을 담보로 해서라도 꼭 손에 넣으셨다. 이런 날이면 술상이 차려졌다. 일본 영화감독이나 언론인들이 모여 술 한잔을 기울이면서 자료를 보고 놀라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2년에 돌아가셨다.
▶2002년 병상에서 한일 월드컵을 보면서 흐뭇해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한일 젊은이들이 응원하는 것을 보면서 '현대 조선통신사가 왕래하는 걸 보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해 10월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무엇을 알리고 싶었나.
▶아버지는 어두웠던 한일 관계를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불행은 없어지질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200년 넘게 평화적으로 지속된 조선통신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밝은 면을 이끌어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 아버지라면 어떤 조언을 하실 것 같은가.
▶'너무 걱정하지 마라. 400년 전에도 해결했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한일 관계에 가장 강조한 점이 있다면.
▶조선통신사를 악연으로 얼룩진 한일 관계 회복 모델로 삼고자 했다. 200년 이상 조선통신사가 12차례 왕래하는 동안 빛과 그림자도 있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던 것은 아니었다. 통신사 교류의 힘은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믿음을 통해 사귄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살아 계신다면 '신뢰와 성심'을 강조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민중의 힘을 믿으신 것으로 보인다.
▶조선통신사는 한류의 원조다. 아직도 일본 곳곳에는 이를 위한 축제와 조선통신사 인형 만들기 전통이 남아 있다. 이런 것들은 역사에 기술되지 않은 내용들이다. 아버지는 민중의 힘에 주목하신 것 같다. 그리고 영화를 도구로 택하신 것도 결국은 민중의 생각을 바꾸면 역사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기 때문인 듯하다.
-당신도 일본서 이지메(왕따)를 당했다고 들었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겪은 차별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
◀영국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와 인도 접경지역에서 벌어졌던 임팔전투와 관련된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1995년 영국에 있던 당시 연합군 병사들을 수소문했다. 그들은 내가 일본인이라고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일본군 소속의 한국인에게 고문을 당했다며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던 피해자인 내가 어느새 가해자가 돼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시고자 한 일의 소중함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5년 전 아예 한국으로 왔다.
▶NHK에서 일할 때 '김연아 선수'를 취재하기 위해 한 달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말을 배웠다. 한국어 실력이 조금씩 늘면서 영국에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프로젝트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2010년 서울 이촌동에 집을 구해 본격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일이 아버지의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었나.
▶재일교포 1세들의 모습을 담은 해방의 날을 한국에서 상영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많았으나 결국 돈이 문제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처럼 떼쓰며 해달라고 하지 마라. 때가 오면 한국에서 먼저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2년 만에 영화를 한국에서 상영했다.
-올해 4월에는 한국서 '조선통신사'도 상영했다.
▶제작 36년 만에 고국 극장에서의 첫 공식 상영이었다. 번듯한 자막을 입혀 고국 극장 스크린에 거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 꿈이었다. 그것을 하고 나니 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했겠다.
▶꿈을 대신해 이루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젊은 학생들이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요즈음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영화 상영을 한다고 한일 관계가 좋아질까'라는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을 그대로 드리겠다. 과연 영화 상영으로 한일 관계가 좋아질까.
▶이 영화를 본 젊은이들은 한일 관계의 밝은 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른 각도로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나.
▶조선통신사 자막을 입힐 때 너무 힘들어 전화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자료는 너무 많고 정리가 돼 있지 않아 힘들었다. 더구나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다.(신기수 씨의 책은 규슈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으며 영화는 도쿄근대국립미술관 필름센터에 있다. 또 조선통신사 자료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 '신기수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전시 보관돼 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어머니도 한국인인데 로맨틱한 '바보 부부'였다. 그 당시 파리 유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결혼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셨다. 아버지의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다. 어머니는 패션 일을 하면서 남편이 자유롭게 물건을 구입하고 자료를 모으실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신도 로맨틱한 것 같다.
▶바보 부부에 바보 딸이다. 영국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열심히 하였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 두 분의 무모함과 로맨틱한 점을 모두 닮아 대책이 없다.(웃음)
-힘들 때면 괜히 이 일을 시작했다는 후회는 없는가.
▶한국에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아버지의 넓고 큰 세계를 대할 때면 또 자극을 받는다. 대구의 우록에도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다.
-앞으로의 꿈은.
▶아버지의 영화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싶다. 인터넷에서의 작업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싶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규모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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