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의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 알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 돌아봐야지
어느날 문득 절필해 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전문.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너무 가혹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가슴을 뜯으며 울고,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마음속 소리치고, 믿었던 누군가로부터는 내팽개쳐지고, 정녕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삶의 시간들이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먹고살기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만 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마저도 상처받고, 이제 기댈 곳 하나 없어진 삶, 그때야 마음에는 지진이 일어난다고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지진이라는 변화를 위해 그 가혹함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라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우리 어느 누구도 그 가혹함을 바라지 않고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지진은 심지어 변혁이나 변화가 아니라 파괴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디를,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자들이 편위(비껴남)하지 않고, 운명의 속박을 깨뜨릴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인과의 무한한 사슬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지상의 무한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이 자유의지의 원천은 무엇이란 말인가?" 편위는 우연한 것이다. 나에게 오는 이 가혹함도, 이 폭력적 파괴도 나에게는 우연한 것이다. 이 편위의 우연함이 나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수많은 나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나는 또 수많은 나와 우연적으로 만나고 서로서로에게 마음의 지진을 일으킨다. 이것이 현실적인 설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지진은 나에게서 발생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보아야 할 우리 이웃의 지진이기도 한 것이다. 내 운명의 가혹함이 나의 지진이라면, 타인의 운명의 가혹함도 나의 지진이다. 우리는 가혹한 폭력적 사태를 공유한다. 이것이 우리의 시민사회가 좀 더 공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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